"절제된 수평·수직 구도에서
한두 개의 밝은 색면으로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기하학적 추상화 20점 전시
추상은 오묘한 심상의 미학
격정적인 손놀림과 몸짓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잡아내죠"
[ 김경갑 기자 ]
사각형 화면에서 환희와 그리움이 새어 나온다. 싱그러운 설렘까지 담고 있다. 붉은 색면은 웃으며 달려오고 보라색 띠는 뒷걸음질친다. 색면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생각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묘한 생명감도 꿈틀거린다. 한국 색면추상의 선구자 유희영 화백(78)의 대표작 ‘작품 2014 R-7’은 명상 없이는 그림이 안 되고, 그림 그리는 수단 없이는 명상도 불가능하다는 뜻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다음달 4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구관(현대화랑)에서 펼치는 유 화백의 개인전은 유럽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반구상을 시작으로 서정적 추상, 색면추상의 단계를 거쳐 40년째 추상미술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노화가의 기발한 조형세계를 탐색하는 자리다. 전시장에는 극도로 절제된 수평, 수직 구도 속에서 한두 개의 색면으로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대작 20여 점이 걸렸다.
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유 화백은 “추상은 심상의 세계를 자신만의 표현 방법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며 “추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알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를 거쳐 이화여대 미술학부 교수,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지낸 그는 1980년대 한국 추상미술 운동에 동참해 색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의식을 회화로 표현해왔다. 초창기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청색시대((1901~1904)’로부터 영감을 받아 코발트 블루, 프러시안 블루 등 다채로운 청색으로 인간의 사유와 성찰을 모색했다. 1991년 작업실을 충북 옥천으로 옮기면서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붉은 계열 색채를 많이 사용했다. 최근에는 몇 개의 색띠로 화면을 분할하면서 마음속의 움직임을 잡아내 국내 화단에서 ‘색의 건축’이라는 장르를 선도하고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유 화백은 “점진적인 색채의 변화, 절제된 색면 분할로 회화의 제한된 공간에서 벗어나 무한히 확장하는 시공간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참 쉽게 그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두 가지 색으로 캔버스를 덮고, 색면으로 공간을 분할합니다. 극도로 단순하지만 대체 무엇을 그렸을까 고민하게 하죠.” 답을 얻지 않아도 되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기 때문에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의 대표작들은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리기보다는 강렬한 색면과 색띠로 인간의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깊숙이 파고든다. 기하학적 형태의 색면을 통해 관람객과의 소통을 꾀하면서 ‘단색화의 숭고미’를 보여준다. 격정적인 손놀림과 몸짓, 사유와 성찰에서 우러난 색면들은 감각적이면서도 리듬감이 살아 있다. 또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띠의 굵기에서는 속도감과 시간성이 느껴진다.
‘보이는 것만이 전체가 아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작품들은 붉게 타는 석양, 깊고 넓은 검푸른 바다, 맑은 가을날의 창천(蒼天), 녹청색의 무성한 여름 숲, 칠흑같은 겨울밤의 적막 같은 이미지를 ‘소환’하며 관람객의 시선을 하염없이 빨아들인다.
유 화백은 “색면추상 작업은 투쟁의 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빨리 그렸구나’라고 보이지만 작업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아서다. 단순한 그림은 기법이 아니라 재료의 문제라고 주장한 그는 “3~4일 걸려야 마르는 유화로 제작하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마치 수행하듯 색칠을 7~8번 반복해 고향의 장맛 같은 색감을 우려낸다”고 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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