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 차원서 초기 논의
현대차, 배터리 안정적 공급 받아
삼성SDI, 대형물량 단번에 확보
내년 '협력 모드' 급물살?
실리 중시하는 정의선 부회장
삼성 '러브콜' 받아들일 가능성
"양사 쓰는 배터리 형태 달라
지금 시작해도 수년 걸릴 것"
[ 고재연/오상헌/도병욱 기자 ] 지난 8월 삼성전자가 “완성차사업을 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을 때다. 재계 일각에선 삼성이 굳이 특정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이례적인 선언을 한 이유를 찾느라 분주했다. 미래 사업 환경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삼성이 훗날 ‘자충수’가 될 수 있는 발표를 한 속내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삼성이 현대자동차그룹에 던진 메시지”란 해석이 나왔다. “완성차를 놓고 현대차와 경쟁할 뜻이 없으니 삼성의 배터리, 반도체 등 부품을 써달라”는 주문이었다는 얘기다.
◆달라지는 삼성-현대차 분위기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3세 경영 체제로 접어들면서 서로를 주시하며 견제하는 관계에서 ‘협력 모드’로 전환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 ‘넘버1’ 타이틀을 놓고 다투던 라이벌 의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약화된 데다 삼성이 현대차의 텃밭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데 따른 것이다.
두 회사가 손을 맞잡을 수 있는 분야는 전기차용 배터리, 차량용 반도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디스플레이 등 다양하다. 업계에선 배터리를 첫손에 꼽는다. 현대차그룹은 ‘공급 부족’ 상태인 전기차용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삼성SDI는 세계 5위 자동차 메이커에 투입될 대규모 물량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두 회사는 실무 차원에서 초기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1990년대 삼성이 완성차사업에 뛰어든 이후 현대차그룹에서 금기로 여겨온 삼성과의 협업이 재개될 조짐”이라고 말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각각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를 쓰고 있다. 폭스바겐 BMW 포르쉐 등에 납품하는 세계 6위 자동차용 배터리업체 삼성SDI가 국내에선 ‘왕따’ 신세인 셈이다. 두 회사가 협업하더라도 삼성 배터리가 현대차에 장착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현대차는 ‘파우치형 배터리’를 쓰는데 삼성SDI는 ‘각형 배터리’를 주로 생산하고 있어서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지금 시작해도 제품 개발, 필드 테스트 등을 거치는 데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부터 협업 논의 급물살 탈까
재계에선 두 그룹의 협업 시점을 내년으로 예상했다. 지난달 승진한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정 부회장이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데다 커넥티드카 등 미래 자동차 기술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는 만큼 전장(자동차 전자장비) 분야 강자인 삼성과의 협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내다봤다. 정 부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오랜 기간 친분을 쌓은 것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그동안 수차례 현대차그룹 문을 두드렸지만 현대차 최고위층에서 ‘삼성이 언제 다시 완성차사업에 뛰어들지 모른다’며 반대한 것으로 안다”며 “그룹 실권을 쥔 정 부회장이 삼성의 ‘러브콜’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최근 들어 정 부회장에게 힘이 실리면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아차가 지난 8월 삼성전자와 처음으로 공동 마케팅을 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 부회장도 올 들어 외부행사 때 사용하는 업무용 차량을 쌍용 체어맨에서 현대 제네시스 EQ900으로 바꿨다.
재계 관계자는 “두 그룹 모두 국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협업하면 연구개발(R&D) 등에서 상당한 시너지를 낼 것”이라며 “한번 물꼬가 트이면 두 그룹의 협업 분야는 한층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고재연/오상헌/도병욱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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