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정치부 기자) ‘9·19 평양선언’ 직후, 남북과 미국 정상 3인의 ‘시간표’는 대체로 일치된 듯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평양선언을 전후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낸 서신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사랑에 빠졌다”는 과감한 수사도 서슴치 않았다. 남북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통한 간접화법으로 연내 ‘서울 답방’을 공언했다. 2차 미·북 정상회담, 북한의 추가 비핵화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종전선언, 김정은의 서울행 등이 2018년이 저물기 전에 모두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다.
역사적인 평양선언 이후 한달 여가 지났다. 일치된 듯 보였던 3국의 시간표는 서로 다른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를 것 없다”는 듯 2차 미·북 정상회담을 내년으로 미뤘다. 북한도 미국의 실무협상 제안에 일체 미동하지 않는 등 잠행 모드로 돌아섰다.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만 일정표대로 움직이고 있다. 23일 평양선언과 남북군축에 대한 비준안을 국회 동의없이 심의·의결한 것도 ‘문(文)의 시간표’에 예정돼 있던 과정이었음이 분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유를 부리는 건 11월6일로 예정돼 있는 중간선거의 영향이 크다. 현 시점에서 북한과의 추가 협상은 실익이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란 추론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늘 자랑하듯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멈췄고, 핵실험도 하지 않고 있다. ‘통제가능한 북한’ 정도면 중간선거 재료로서 충분하다. 2차 정상회담을 서둘러봤자 김정은이 요구하는 종전선언이나 제재완화를 제시해야할텐데 이런 대북 유화책은 선거에서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도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무회담을 열어봤자 북이 원하는 종전선언 혹은 제재완화를 받아내기 어렵다고 보고 있을 것이란 추론이다. 김정은이 꽤 오랫동안 두문분출하며, 장고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국을 움직일 지렛대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만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등 우방과의 연쇄 회동을 주요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다급해진 건 우리 정부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이 내년으로 넘어가면 연내 종전선언을 명기한 ‘판문점 선언’의 이행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종전선언이나 제재완화 조치없이 김정은이 서울 답방을 결행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정부는 우리만의 시간표가 이행될 수 있음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 답방만해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이 “연내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낙관론을 펴고 있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정도의 해석이 나오고 있다. 첫번째는 ‘김정은 답방’을 또 다시 교착에 빠진 미·북 협상을 추동하기 위한 촉진제로 활용하려한다는 시각이다. 북한 최고 ‘존엄’의 역사적인 첫 방한은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를 주목하게 할 수 있다. 백악관의 핵심 의제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한반도 비핵화 의제를 다시 중심에 오도록 만드는데엔 ‘김정은 답방’ 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남북관계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성의 보이기’ 차원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남북경협 재개만해도 국제사회 제재가 풀릴 때까지 손을 놓고 있기보다는 판문점 선언 이행과 관련한 초기 단계 조치라도 취하려고 하고 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 철도연결을 위한 착공식 개최,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방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연내 종전선언 및 김정은 답방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설사 성사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 정부가 그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갖고 있고, 계속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줘야한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달라진 3국의 시간표를 다시 정리해보면, 미·북은 같이가고, 한국만 앞서간다는 느낌이다. 자칫 우리 정부가 제시한 일정표가 어그러진다면 국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국회 동의를 생략한 평양선언 비준은 이미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다. 이제라도 연내로 한정한 한반도 비핵화 일정표를 좀 더 긴 호흡으로 조정하는 게 어떨까. ‘출구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 /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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