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폰값 동남아의 6배…해외 마약조직 놀이터 된 한국

입력 2018-10-26 18:22  

경찰팀 리포트

외국인 마약사범 5년새 2.6배↑

올 1~8월 압수된 필로폰 165㎏
지난해 동기대비 828% 폭증
X레이 검사서도 적발 어려워

검거 사범 절반 태국 등 동남아人
운반책 10~20대 청년·여성 증가

한국, SNS 통해 마약 쉽게 구입
"처벌수위 낮아 범죄 키워" 지적



[ 임락근/조아란 기자 ]
대만 타이베이의 한 고급 음식점에서 발레파킹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만인 장모씨(25)는 올해 초 손님으로부터 달콤한 제안을 받았다. 한국에 가서 태국에서 도착하는 ‘화물’을 받아 현지 담당자에게 전달해주면 20만대만달러(약 730만원)를 주겠다는 얘기였다. 안정적인 직업이 없던 장씨는 8개월치 월급에 가까운 금액에 솔깃했다. 화물이 마약을 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고민 끝에 제안을 수락했다.

지난 3월 말 한국에 입국한 그는 대만 총책으로부터 받은 활동비로 창고와 원룸을 임차하고 주변 지리를 익히며 사전 준비를 했다. 태국발 화물은 7월 초 부산항에 도착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나사 제조기였지만 내부에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112㎏이 숨겨져 있었다. 장씨는 경기 화성시의 한 공장으로 옮겨 미리 섭외한 대만인 기술자와 함께 기계를 절단한 뒤 필로폰을 꺼냈다. 일본인 운반책과 접선해 필로폰 20㎏을 팔아 11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뒤쫓고 있었다. 8월 대만으로 잠시 몸을 피하려던 장씨는 인천국제공항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외국인 마약사범 급증

장씨 사례처럼 외국인이 국내로 마약을 밀반입하는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26일 경찰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검거된 외국인 마약사범 수는 2012년 359명에서 지난해 932명으로 2.6배 늘었다.

무색무취해 마약 탐지견조차 찾아내기 어렵다는 필로폰이 ‘핫템’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올해 1~8월 압수된 필로폰 양은 165㎏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무려 828% 증가했다. 경찰 관계자는 “외국인들이 필로폰을 대량으로 반입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압수량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에도 A씨(39) 등 대만인 20명과 한국인 B씨(51) 등 2명이 붕대 속에 62.3㎏의 필로폰을 숨겨 국내에 들여오려다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마약 밀반입 수법도 교묘해지고 있다. 이들은 해상으로 운송되는 화물에 대해서는 한국 관세청이 전수조사하지 않는다는 허점을 노린다. 또 장씨 일당처럼 마약을 기계류에 숨겨 보내면 세관의 엑스레이 검사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기계류뿐만 아니라 냉동 다랑어에 필로폰을 숨겨 들여오려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관세청 관계자는 “세관 검사에 대비해 현지에서 모의실험까지 거치는 등 해외 마약 조직들의 밀반입 수법이 갈수록 치밀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밀반입 규모도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g’ 단위였다면 최근에는 ‘㎏’ 단위다. 장씨가 들여온 필로폰 112㎏은 시가 3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경에는 해외 폭력조직의 개입이 있다. 장씨 사건에도 대만 최대 폭력조직 ‘죽련방’과 일본의 3대 폭력조직으로 알려진 ‘이나가와카이’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죽련방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펼치는 ‘마약과의 전쟁’에서 ‘주적’으로 꼽힐 만큼 악명이 높다.

한국 마약 시세, 홍콩 베트남의 6배

국내 마약 밀반입이 늘어나는 것은 국제시세 대비 가격이 높기 때문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필로폰 g당 도매가격은 285.3달러다. 베트남(45달러)과 홍콩(46.5달러), 중국(58.6달러)에 비하면 5~6배가량 높다.

과거에는 중국 동포를 중심으로 주로 중국에서 마약이 밀반입됐다면 최근에는 대만,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마약을 들여오는 사건이 늘었다. 올해 1~8월 검거된 외국인 마약사범 중 절반이 태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적자였다.

일반인들이 마약 운반책으로 가담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 8일 검거된 대만 마약 조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한국으로 필로폰을 밀수할 운반책을 모집했다. 함께 검거된 운반책 가운데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 여성 등 일반인이 포함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마약 범죄 조직들은 역할을 잘게 쪼개고 임무를 단순화하는 등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점조직화했다”며 “이 때문에 최근 경찰의 용의선상에 없는 일반인이 검거되는 사건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싱가포르에선 마약밀매범 사형

마약 관련 범죄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면서 한국이 국제 마약조직의 놀이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내에서 마약 등 금지된 약물을 수출입, 제조, 매매하거나 알선하면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게 돼 있다. 그러나 적발된 국제 마약조직원에 대한 처벌 수위는 높지 않다. 2013년 국내에서 제조한 필로폰을 밀수출한 호주인 A씨(31)에게 인천지방법원은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마약범죄에는 심신미약, 자수, 수사협조 등이 양형 인자로 작용한다. 반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는 마약 밀매범을 사형에 처하기도 한다. 2014년 중국 지린성 바이산시 중급인민법원은 중국을 거쳐 한국 조직에 마약을 밀수, 판매한 혐의로 2011년 붙잡힌 한국인 김모씨(53)와 백모씨(45) 등 2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했다.

마약 복용에 대한 처벌 수위는 이보다도 훨씬 낮은 편이다. 초범이 아니어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내려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 8월 대마초 흡연 혐의로 기소된 배우 기모씨(64)에게 1심 재판부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기씨는 1991년 동종 전과가 있어 “처벌 수위가 너무 약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임락근/조아란 기자 rkl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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