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정치부 기자) 2008년 1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당시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한미동맹 복원”을 첫 일성으로 내뱉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발표한 ‘10·4 선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일 만큼 재빠른 결정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 특사에게 친서까지 들려보내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한국의 대북 햇볕정책이 종료됐음을 고했다.
정 특사의 방미 발언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라인에 있던 핵심 관계자들에겐 지금까지도 억울한 감정이 씻기지 않는 기억이다. 지지층들의 열망을 배신하고 미국에 사대(事大)한다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미국과 호흡을 맞추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 절절함이란 이루 말하기 힘들다. 이라크 파병에 응하고, 농업개방을 포함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하느라 노무현 정부는 정권 운영의 동력을 사실상 소진한 상태였다. 정권 교체의 예정된 시간이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김정일의 서울행까지 추진했던 건 노 대통령과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이 한반도 평화와 전쟁 종식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 지를 짐작케 해준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들고 나온 이래 한·미 양국 집권당의 성향은 공교롭게도 거의 매번 엇갈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대북정책의 일대전환을 예고했으나 2001년 1월 미국 행정부는 빌 클린턴(민주당)에서 조지 부시(공화당)으로 바뀌었다. ‘김대중-부시’ 시절 한미 관계는 최악에 가까웠다. 두 정상의 첫 워싱턴 회담은 요즘 자주 등장하는 ‘외교적 참사’의 시초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부 백인’의 거만함과 무지에 혀를 내둘렀고, 부시 대통령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역겨운 김정일’을 후원하는 ‘이상한 정치인’에 불과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파트너도 조지 부시 대통령이었다. 노(盧) 정부의 대북 정책은 꼬일대로 꼬인 상태였다. 6자 회담을 통해 가까스로 미·북 대화 자리가 마련됐지만 김정일은 2006년 10월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세계에서 8번째 핵보유국이 됐음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노 정부는 북한과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때마침 미국에선 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강성 매파의 위세가 약해지면서 2007년 ‘2·13 베를린 합의, 12월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등이 성사됐다.
과거 사례를 종합해보면 북한의 변화는 김대중, 노무현 등 진보를 표방하는 한국 정부와 미국의 공화당의 조합이 이뤄졌을 때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대북 강경론을 폈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전략전 인내’를 천명한 버락 오바마 정부의 조합은 북한을 고립시켰고, 더욱 핵탄두와 시설을 늘리는 데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미국의 파트너는 공화당의 이단아로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과거 ‘실적’이 입증하듯이 ‘문재인-트럼프’ 조합은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가장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실무회담마저도 비밀리에 성사되곤 했던 미·북의 만남이었건만 지난 6월엔 사상 처음으로 미·북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손을 잡았다. 2차 정상회담까지 논의되고 있으니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전문가들은 당근과 채찍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최상의 한미 조합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말한다. 채찍이 너무 과도해 당근이 매력적이지 않게 보이게 하거나, 당근이 너무 커서 채찍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전자의 사례는 ‘평양 폭력’ 운운하는 대북 선제타격론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취임 초엔 대북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엄청난 채찍을 휘둘렀다.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잇따른 핵·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동맹 균열에 대한 우려는 ‘비대한 당근’과 관련돼 있다. 남북경협 재개 등 북측에 제시한 당근이 너무 크다보니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라는 채찍이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트럼프 대통령은 ‘핵실험도 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는 김정은’을 높이 평가하며, 미·북 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한미동맹 균열론은 한국 좌파 정부가 늘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다.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지지세력들이 등을 돌리고, 조금만 고개를 세우면 우파들의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세심한 조율과 신중함이 늘 요구된다. 스티브 비건 미국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29일 방한, ‘2인자’로 불리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면담을 가졌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건너뛰고 이뤄진 만남이라 행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 지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같은날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강경화 외교부장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 정부의 대북 정책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끝)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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