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界 제로…기업들 "내년 투자·채용은 커녕 매출 예상도 어렵다"

입력 2018-10-31 17:48   수정 2018-11-01 09:31

내년 사업계획도 못 짜는 기업들

10대 그룹 중 9곳 내년 사업계획 초안조차 마련 못 해

삼성전자, 내년 영업이익 10% 이상 낮춘 '역성장' 전망
현대차는 '실적 추락'에 사업계획 전면 재검토 나서
규제·親노동정책에 대외악재 덮쳐…기업 "숨이 막힌다"



[ 장창민/류시훈/도병욱 기자 ] 국내 간판 기업들이 길을 잃었다. 상당수 기업이 내년 사업계획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 내년 예상 매출과 영업이익, 투자 규모 등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국내 경기침체 및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 원고(高)·고유가·고금리 등 대내외 변수가 점점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는 탓이다. 넘쳐나는 각종 규제와 친(親)노동 정책, 반(反)기업정서 등도 기업들을 잔뜩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재계에서는 “경영 불확실성이 너무 커 투자와 채용은커녕 신상품 출시, 브랜드 홍보 등에 나설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내년 사업 10대 그룹 중 1곳만 초안 마련

한국경제신문이 31일 10대 그룹(자산 기준, 공기업·금융회사 제외)을 대상으로 ‘내년 사업계획 현황’을 긴급 설문조사한 결과는 예상보다 암울했다. 얽히고설킨 대내외 변수로 10대 그룹 중 9곳이 내년 사업계획 초안조차 짜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업마다 통상 10월 말 또는 11월 초 사업계획 초안을 마련하고, 늦어도 12월 중순에는 확정해왔던 것에 비하면 올해는 속도가 한참 늦다는 분석이다.

10대 그룹 대부분 내년 투자와 채용, 매출·영업이익 목표를 낮추거나 올해 수준으로 잡는 등 보수적 경영전략을 구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기업들이 해마다 전년 대비 5~10%가량 매출 및 영업이익 목표를 늘려잡던 것과는 딴판이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그룹마저 아직 내년 사업계획 초안을 붙들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중국 성장률이 둔화돼 반도체 수요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지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내년 영업이익 목표를 올해 전망치(약 65조원)보다 10% 이상 낮은 50조원 후반대로 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사정은 더 안 좋다. 현대차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2889억원, 영업이익률 1.2%)이 전년 동기(1조2042억원)의 4분의 1을 밑도는 수준으로 추락하자 내년 사업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고위관계자는 “기존에 잡고 있던 초안 대신 백지 상태에서 다시 사업계획을 짜는 것으로 안다”며 “확정 시기도 예년(12월 중순)보다 늦어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SK그룹도 그룹 차원의 사업계획 초안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LG그룹만 초안을 작성한 상태다. LG화학을 시작으로 계열사별 사업보고회를 열고 있다. 다만 사업 환경을 둘러싼 변수가 너무 많아 최종안을 확정하는 데 당초 예상보다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해를 넘겨 내년에 사업계획을 정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도 있다. 신세계는 연말까지 계열사별 사업계획 초안의 수정 작업을 거쳐 내년 초 그룹 차원의 사업계획을 확정하기로 했다.

◆쏟아지는 악재…불안한 기업들

주요 그룹이 내년 사업계획 윤곽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어서다. 미국은 본격적인 긴축에 들어갔고 신흥국 위기는 장기화할 조짐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은 날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기업들을 옥죄는 규제 강도는 점점 더 세지고 있다. 정부는 지주회사의 자회사 및 손자회사 지분율을 높이라고 압박하는 동시에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회사에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하고 나섰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주요 기업 이사회 자리 절반 이상이 투기펀드 및 소액주주에 넘어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로제) 시행과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등 친노동 정책도 기업들을 짓누르는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는 관련 법을 고쳐 실직자 및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겠다는 방침까지 들고나왔다. 국정 과제인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해서다. 재계에선 매년 기업들의 발목을 잡아온 ‘노조 리스크’가 더 커질 것이란 걱정이 쏟아지고 있다.

중소·중견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들 사이에선 “한국에서 더 이상 제조업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경기는 얼어붙고 규제는 쏟아지는데 대외변수마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며 “누가 한국에서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 창출에 나서려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장창민/류시훈/도병욱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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