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화이트 스완'에 손놓고 있으면…

입력 2018-11-04 17:40  

주가 곤두박질치고 신용부도 쓰나미 몰려와
주력산업마저 흔들리는데 '펀더멘털 타령'뿐
뉴노멀 환경 딛고 설 대응 로드맵은 있어야

이인실 < 서강대 교수 >



1967년 흑백 TV로 첫 방송된 이래 포맷을 바꾼 적도 없는데 반세기 넘게 인기를 끌고 있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동물의 왕국’이다. 화면에 비쳐진 약육강식, 생로병사 등 정글 속 동물들의 삶을 인간 삶에 투영해 보면 인간 세계도 동물 세계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 동물의 왕국 경제편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주식시장을 ‘공포’가 휩쓸고 지나갔다. 지난달 11일 ‘검은 목요일’ 이후 국내 주가의 폭락세가 이어지며 우려했던 2000선이 붕괴됐다. 미국 금리 인상, 달러 강세, 미·중 무역분쟁 격화 등 연초부터 꾸준히 제기된 이슈들로 인해 신흥국 시장 불안이 가속화된 탓인지 일본 대만 등 아시아 각국 주가도 급락했는데, 특히 한국 주식시장의 하락 폭이 제일 컸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지난 1~9월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서 외국인 순매도 금액은 2조2458억원에 달했다. 특히 연간 개념으로 3년 만에 처음 외국인이 주식시장에서 순매도로 돌아섰고, 올 들어 최근까지 순매도 금액은 5조6000억원을 넘었다. 지난 9월엔 올 들어 처음으로 채권시장에서 1조3000억원 넘는 외국인 자금이 순유출된 것도 심상치 않다.

설상가상으로 9월 산업생산은 전월 대비 -1.3%로 하락폭이 5년6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고, 성장세를 버텨주던 소비마저 -2.2%로 4개월 만에 하락했다. 그나마 증가세를 보인 설비투자도 특정 업체의 반도체공장 증설 효과를 빼면 마이너스다. 이처럼 대부분 경제지표가 악화되고 금융시장에서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는데도 정부가 “펀더멘털(기초체력)은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불행하게도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상황과 닮았다.

정부는 “위기가 아니다”고 하면서도 내년도 경상성장률 전망치인 4.4%의 두 배가 넘는, 9.7%나 늘어난 확장예산안(470조5000억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 2년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증가”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확대된 재정 지출에도 불구하고 개선된 정책 효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일자리 예산을 대폭 늘렸지만 청년실업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중이다. 구직기간 6개월 이상 장기실업자는 올 1∼9월 평균 15만2000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1만 명(6.9%) 늘었다. 같은 기준으로 통계를 작성한 1999년 6월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이번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제시된 ‘함께 잘사는 포용국가’는 한국 경제가 지향해야 할 노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정부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생각은 전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2015∼2017년 전국 소상공인 실태조사’를 보자. 소상공인의 월평균 매출은 지난해 1077만원으로, 2015년보다 1.31%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이 기간의 물가상승률(2.9%)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줄어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핵심은 ‘자국 우선주의’로 치닫는 미국과 중국의 통상마찰, 일본의 패권주의 등 만만찮은 세계 경제 흐름 속에서 미국과 중국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 반(反)기업 정서 등 한국 경제 상황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양적완화 정책으로 지난 10년간 전 세계 국가 부채는 29조달러에서 60조달러로 두 배나 됐고 기업과 가계 부채도 급증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라 신흥시장국에서부터 신용부도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10여 년의 시차를 둔 1984년 남미 외환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다.

예측이 가능하고 예방할 수도 있는데 제때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해 발생하는 위기를 ‘화이트 스완’이라고 한다. 10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땐 주요 20개국(G20)을 결성하고 미국이 리더십을 발휘했다. 지금 위기가 터진다면 상황은 그때와 반대 방향으로 갈 것이 자명하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작은 동물들도 생존 본능에 입각해 위기가 오면 대처한다. 조선에 이어 자동차까지 한국 주력 산업 경쟁력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적어도 화이트 스완에 대한 선제적 대응책과 우선순위에 입각한 로드맵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insill723@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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