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재분배 효과 없다" 지적에
정부, 소득별 전기 사용량 조사
[ 서민준 기자 ] 정부가 전기 사용이 많을수록 요금이 급격하게 오르는 주택용 전기요금 체계를 개편하기 위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소득 수준과 전기 사용량’의 상관관계를 따져보기 위한 것으로 조사 결과에 따라 누진제 유지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1974년 도입된 이후 45년째 유지 중인 누진제가 이번에는 폐지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부처 내 전기요금 체계 개편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누진제 개편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12일 밝혔다. 제도 개선을 위한 첫 작업으로 한국전력과 함께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전국 1만 가구를 대상으로 소득수준별 전기 사용량을 파악한다.
정부가 누진제 개편 작업에 들어간 것은 이 제도가 불합리하고 실효성도 떨어진다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주택용 전기료는 전기 사용량에 따라 납부자를 3단계로 나누고 최대 구간에 최저 구간의 세 배에 달하는 요금을 물리는 누진제로 운영되고 있다.
누진제는 산업용, 교육용 등과 달리 주택용에만 적용돼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았다. 미국 일본 중국 등에서도 주택용 전기료에 누진제를 적용한다. 하지만 누진율은 한두 배에 그친다. 독일과 프랑스 등은 누진제를 운영하지 않는다. 한국의 주택용 전기요금은 유난히 징벌적 성격이 강하다는 얘기다.
누진제는 ‘소득이 많을수록 전기료도 많이 물려 소득재분배 효과를 거두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여기엔 저소득층은 전기를 조금 쓰고 고소득층은 많이 쓴다는 전제가 있다. 하지만 이 전제도 요즘 시대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고소득층일수록 외부 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해 가정 내 전력 사용량이 적을 수 있다”며 “전기요금으로 1970년대식 소득재분배 논리를 들이대는 건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고소득층일수록 고효율 스마트 가전 사용 비율이 높아 결과적으로 사용시간 대비 전력 소모량이 적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도 소득수준별 전기 사용 패턴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과거 국회예산정책처 등에서 소득수준별 전기요금 부담을 추정한 적이 있으나 표본의 신뢰성이 낮아 정책 수립을 위한 자료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실태조사에 착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산업부는 조사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이전에 조사하지 않았던 ‘단일계약방식’의 아파트 등도 표본에 포함해 조사하고 있다.
실태조사 결과는 누진제 폐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전기 사용량이 적은 계층에 고소득층이 의외로 많다는 결과가 나오면 누진제를 유지할 명분이 적어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는 “구체적인 실태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지만 외국 사례 등을 봐도 단일 전기요금 체계로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며 “다만 누진제를 폐지하면 전기 사용량이 적은 계층은 일시적으로 전기료가 뛰는 만큼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는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태조사 결과는 이달 말 나올 예정이다. 산업부는 이를 바탕으로 전기요금 개편 방안을 마련해 내년 초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국회에 제출하는 개편안에는 산업용 경부하 요금제 개편 방안도 담길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연료비 연동제 도입 등은 내년 이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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