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학서 생명과학으로…변신 성공한 머크
미래에 대한 답, 호기심서 나와…자극 못하는 사업 과감히 정리
노벨상 수상자 5명 초청해 '호기심 콘퍼런스'까지 개최
액정·헬스케어사업 구조조정…일반약·바이오시밀러도 매각
바이오 신약 개발에 역량 집중…모든 사업에 디지털 접목할 것
韓기업들과 다양한 협력…내년 송도에 생명과학센터 개설
"한국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 전예진 기자 ]
올해 설립 350주년을 맞은 독일 머크는 바이오 격동기에 가장 성공적으로 변신한 기업으로 꼽힌다. 화학 전자소재 등에 치중하던 머크는 2007년 유럽 최대 바이오 회사 스위스 세로노를 103억달러(약 12조원)에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밀리포아(2010년), 시그마알드리치(2015년) 등을 잇달아 사들이며 바이오 기업으로 거듭났다. 세계 최장수 화학 기업 머크의 변신을 이끈 주인공은 스테판 오슈만 회장(사진)이다. 2011년 다국적제약사 MSD에서 머크의 헬스케어사업 보드멤버로 합류한 그는 2016년 회장에 취임한 뒤 생명과학부문 매출을 전년의 두 배 가까운 59억유로(약 8조원)로 키워냈다. 과감한 인수합병(M&A)과 사업재편을 통해서다.
최근 독일 다름슈타트 본사에서 만난 오슈만 회장은 단기간에 바이오 분야의 혁신 기업으로 발돋움한 비결로 ‘과학적 호기심’과 ‘기업가정신’을 꼽았다. 그는 “350년간 머크를 지탱해온 DNA”라며 “이를 바탕으로 헬스케어, 기능성 소재(전자소재), 생명과학 분야를 아우르는 과학기술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했다. 머크는 전자소재와 의약품 제조장비 분야의 세계적 강자다. 디스플레이 소재와 바이오의약품 제조장비는 글로벌 1위, 의약품 부문은 글로벌 15위권이다.
▶취임 이후 머크가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회사 포트폴리오를 바꾸기 위해 최근까지 400억유로(약 52조)를 투자했습니다. 액정 사업과 헬스케어 부문의 구조조정을 끝내고 일반 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사업을 매각했어요. 앞으로는 바이오 신약개발 등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헬스케어, 기능성 소재, 생명과학 분야는 성장 잠재력도 크고 서로가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업 영역에 디지털을 접목해 디지털 기업으로 변신하려고 합니다.”
1668년 약국에서 출발해 1990년대 액정 디스플레이(LCD) 선두 주자로 주목받던 머크는 헬스케어와 생명과학사업이 주축인 글로벌 생명과학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생명과학부문의 매출 비중은 2015년 26%에서 지난해 40%로 높아졌다. 제조업의 위기로 화학 기업들이 고전하는 가운데 급성장하는 바이오산업에 선제적으로 투자한 전략이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350년 성장 키워드로 과학적 호기심을 꼽았는데요.
“머크는 3개의 다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달라도 과학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암과 같은 중증 질환을 위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혁신적인 솔루션으로 연구 속도를 높이고 반도체 성능을 개선하려면 과학적 호기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머크는 직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에는 노벨상 수상자 5명을 초청해 ‘호기심 콘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생물학, 바이오, 소재 연구 분야에서 획기적 성과를 달성한 연구자에게 주는 상도 새로 제정했죠. 직원들이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오슈만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변화에 익숙지 않은 기업 문화를 바꾸는 데 집중했다. 본사 앞 상징이었던 ‘블루 피라미드’ 조형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이노베이션센터를 지었다. 기업로고(CI)도 바꿨다. 홈페이지, 문서 등 사내 모든 디자인을 연두, 파랑, 하늘, 보라 등 총천연색으로 꾸몄다. 호기심을 촉발하는 게 목적이었다. ‘놀이동산 같다’ ‘유치하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했다. 지난 4월 비타민과 일반 의약품 사업을 P&G에 매각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적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학교 교육과 원리 원칙을 배우고 나면 호기심을 잃게 되죠. 원칙을 따르면서 동시에 호기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기심이 충만한 문화 구축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구체화할 수 있도록 ‘이노스파이어(Innospire)’라는 아이디어 창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실제 사업화로 이어진 사례가 많습니다.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제출자가 사업 구상을 할 수 있도록 이노베이션센터에 입주해 액셀러레이터(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외부 파트너,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학계와도 협업합니다.”
▶머크는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과도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머크의 3대 사업이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기능성 소재 사업에서 머크는 한국의 디스플레이산업, 전자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M랩을 운영하고 있는데 내년에 인천 송도에 새로운 생명과학센터를 개설합니다. 이 정도면 한국과 사랑에 빠졌다고 할 수 있죠.”
▶지난해 독일 프레제니우스에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매각했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머크는 제약바이오 사업에서 대규모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바이오시밀러 개발보다 새로운 제품에 연구 자원을 집중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하지 않지만 한국 바이오시밀러 기업들의 바이오 프로세스 공정 개발을 지원하는 생명과학 사업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분야입니다.”
▶머크는 최장수 가족기업으로 유명합니다. 가족경영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머크는 직원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1853년 머크의 고용계약서를 보면 연금과 의료 급여를 지급하라는 내용이 담겼을 정도죠. 실적에 치우치지 않고 과학 지식, 과학적 호기심,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머크가 오랜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머크가는 시대적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350년 동안 대주주로서 회사를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유행에 따라 기업 전략을 세우지 않죠. 구성원들도 이를 신뢰하고 존중합니다. 과학에 기반한 인간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의 머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슈타트=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