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두현 기자 ] 196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북한에 한참 뒤졌다. 각종 자원과 기반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발전량도 북한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많은 국민이 보릿고개로 고생했고, 배를 곯은 아이들의 얼굴은 누렇게 떴다. ‘등 따습고 배 불러 보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춘궁기에 가뭄까지 겹친 1970년 4월22일,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장관회의를 소집하고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안했다.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지원하며 주민들이 원하는 사업을 자율적으로 펴도록 했다. 자발적인 노력을 보인 마을 1만6600여 곳에는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다시 공급했다. 이렇게 경쟁·선별 방식으로 점화한 새마을사업은 도시와 직장·공장까지 확산되며 국민적 근대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이 확립됐다.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부지런히 노력하고 서로 협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순수 민간 주도로 체계를 바꿔 자율성을 높였다. 2000년대에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아갔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유엔의 비정부기구(NGO)로 활동하며 저개발·사회주의국가에 새마을운동을 보급했다. 유엔이 사업의 지속성을 높이 사 국제개발협력의 새로운 모델로 삼은 뒤로는 자랑스런 ‘글로벌 브랜드’로 우뚝 섰다. 이때부터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캄보디아 등 아시아와 르완다 세네갈 등 아프리카에 새마을운동 보급이 빨라졌다.
그동안 ‘새마을’ 브랜드를 도입한 나라가 80개국에 이른다. 저개발국가들은 “새마을운동 덕분에 기아에서 벗어나고 자립역량까지 키울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전한다. 덕분에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난중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런 새마을운동이 현 정부에서 ‘적폐’로 몰려 명칭까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박정희 대통령 고향인 구미시가 ‘새마을과’를 폐지하기로 해 논란을 빚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이 “이름 바꾸지 말고 사업을 계속해달라”고 해 위기를 넘겼고 ‘새마을과’도 살아남게 됐다. 그 배경에는 문 대통령이 지난해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으로부터 “새마을운동 지원에 감사한다”는 말을 잇따라 들은 게 작용했다고 한다. ‘새마을’이라는 브랜드를 이만큼 키우는 데에만 거의 5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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