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을 태동시킨 가상화폐(암호화폐) 비트코인이 위기를 맞았다. 지난 15일 가격 급락으로 지지선이던 6000달러(약 676만원)가 무너진 뒤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철학의 배신이 더 확실한 위기의 ‘징후’다.
이번 암호화폐 시장 폭락의 핵심 원인은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암호화폐) 비트코인캐시의 하드포크(체인분리) 과정에서 빚어진 진영간 대립으로 보인다. 하드포크란 기존 블록체인에서 갈라져 나오며 새로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트코인캐시도 원래 비트코인에서 하드포크를 거쳐 탄생했다. 이번 하드포크의 쟁점은 여기서 더 나아가느냐(비트코인ABC 진영), 아니냐(비트코인SV 진영)를 놓고 의견이 갈린 것이라 할 수 있다.
ABC 진영은 거래 속도를 높이고 스마트 콘트랙트를 구현하기 위한 새 기술 도입을 제안했다. 반면 SV 진영은 특별한 변화 없이 블록 크기만 늘려 속도를 끌어올리자고 맞섰다. 좀 더 기술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ABC 진영은 전통적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암호화폐간 교환이 가능한 ‘아토믹 스와프’의 지원 기능 도입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SV 진영은 기존 비트코인 프로토콜 변경 없이 블록 크기만 32메가바이트(MB)에서 128MB로 키우자고 했다.
기술의 문제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기술적 견해차의 외피(外皮)를 둘렀지만 실체는 혁신(ABC 진영) 대 계승(SV 진영)의 대립이다. 이때 혁신을 긍정적 의미, 계승은 부정적 의미로만 볼 이유는 없다. 개량주의 대 원칙주의의 입장차로 풀이할 수도 있어서다. 매우 고전적인 논쟁이다. 요는, 앞으로도 유사한 사례가 반복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이번 국면은 외생 변수로 빚어진 게 아니다. ABC 진영 우지한 비트메인 대표와 SV 진영 크레이그 라이트 엔체인 수석연구원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설전을 벌였다. 우 대표는 “가짜 사토시를 몰아내야 한다”며 라이트 연구원을 직접 겨냥했다. 라이트 연구원은 비트코인 덤핑을 시사하며 맞불을 놓았다. 생태계는 소수에 의해 뿌리째 흔들렸다.
거대 해시파워(채굴력)를 보유한 주요 행위자들의 치킨게임이 본질이다. 그러면서 비트코인의 핵심 가치인 ‘탈중앙화’가 훼손됐다. 블록체인의 비전을 탈중앙화 기반의 투명성과 신뢰에서 찾는 이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사태다.
비트코인은 중앙화된 제3자를 거치지 않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 스스로에 대한 오롯한 자기결정권 개념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환영받았다. 이번 논란은 그같은 이론적·철학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반례가 될 수 있단 점에서 위험하다.
채굴력(권력)을 가진 소수가 전체 판을 좌지우지한다면 그게 무슨 탈중앙화인가. ‘효율을 위해 불가피하게 택한 중앙화’보다 나은 게 뭔가. 그나마 기존의 중앙화 거버넌스는 불완전한 형태긴 해도 ‘민주적 통제’를 시도하지 않는가.
암호화폐 가격 하락은 차라리 지엽적 이슈가 된다. 가치의 훼손, 철학의 배신이야말로 블록체인의 가능성을 지지해온 강력한 우군이 등 돌려버릴 사안이기 때문에 그렇다. 탈중앙화 거버넌스와 새로운 합의구조 가능성을 제시한 블록체인이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느냐 하는 중대 질문 앞에 섰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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