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자칭 '비트코인 창시자' 한 마디에서 시작된 가상화폐 폭락

입력 2018-11-21 10:12   수정 2018-11-21 11:13

'비트코인캐시 하드포크' 방향 놓고 설전
한주새 가상화폐 시총 70조원 이상 증발
채굴파워 싸움으로 '탈중앙화 가치' 훼손




“모든 비트코인 채굴자들에게 고한다. 당신들이 비트코인캐시 측(ABC 진영) 편을 들면 우리(SV 진영)는 비트코인을 팔아 달러로 환전할 것이다. 그러면 비트코인 시장은 무너질 것이다. 잘 생각해라. 비트코인이 1000달러(약 112만원)가 되어도 날 막을 수는 없다.”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를 자처하는 크레이그 라이트 앤체인 수석연구원이 지난 14일(이하 현지시간) 트위터에 쓴 글이다.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이 트윗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비트코인캐시 하드포크(체인분리) 방향성을 두고 이견을 보이던 비트코인 ABC 진영과 SV 진영의 치킨게임으로 비화한 것이다. 불확실성 우려가 커지면서 한 주 새 전체 가상화폐(암호화폐) 시가총액 70조원 이상이 증발했다.

라이트 수석연구원은 전체 시장을 움직일 만한 힘이 있다. 보유 비트코인 규모만 최소 100만개(약 5조3000억원)로 추정된다. 그가 가진 비트코인 중 일부만 매도해도 시장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이같은 공포감이 시장을 잠식해 비트코인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연이은 연중 최저점 경신이 그 결과다.


라이트 수석연구원은 지난 2015년 자신이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한 인물. 하지만 제대로 된 증거를 내놓지 못해 업계의 질타를 받았다. 올 4월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이 직접 라이트를 겨냥해 “헛소리만 늘어놓는 사기꾼”이라고 맹비난한 게 대표적이다.

그는 올 2월 동료가 보유했던 5조3000억원 규모 비트코인을 가로챈 혐의로 피소 당하기도 했다. 동료 데이브 클레이먼이 사망하자 공동 관리하던 비트코인을 가로채기 위해 서명을 위조한 혐의였다. 그야말로 암호화폐 시장의 ‘트러블 메이커’라 할 수 있다.

그런 라이트 수석연구원이 촉발한 이번 비트코인 폭락 사태의 본질은 간명하다. 소수의 고래(거물)가 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암호화폐 생태계 참여자들에게는 실망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지금도 트위터를 통해 쉴 새 없이 공격적 발언을 내놓고 있다. 20일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영원히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따라서 당분간 이번 사태가 일단락되기 어려워보인다.

단 정작 궁지에 몰린 것은 라이트 수석연구원 본인이라 볼 수 있다. 그가 속한 SV 진영이 적극 지지하는 암호화폐 ‘비트코인 SV’ 시세가 여타 암호화폐보다 빠르게 급락하고 있어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 사람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코인에 대체 누가 투자한다는 말인가. 이번 사태로 그의 ‘불확실성’은 암호화폐 생태계 참여자들 머릿속에 각인됐다.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이 온전하게 작동하려면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비용을 들여 채굴해야 한다. 암호화폐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도 채굴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결국엔 블록체인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블록체인은 이론적으로 과반, 즉 전체 해시파워(채굴력)의 51% 이상이 연합하면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약점이다. 이른바 ‘51% 공격’이다. 그런데 생태계를 무너뜨리려 시도하는 순간 최대 피해를 입는 것은, 해시파워에 상응해 가장 많은 코인을 보유한 세력 자신이다.

라이트 수석연구원의 말 한 마디가 빌미가 돼 비트코인 가격이 30% 가까이 폭락했는데, 비트코인을 많이 보유한 스스로가 수조원 이상 피해를 입는 아이러니(역설)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블록체인은 탈중앙화 가치와 커뮤니티를 훼손하려 시도하면 페널티(벌칙)를 받도록 정교하게 설계돼 있다. ‘진짜’ 사토시 나카모토가 ‘가짜’들을 대비해 준비해놓은 함정 아닐까.

이번 사태는 블록체인 산업에서 ‘부의 중앙화’가 갖는 리스크(위험)와 함께 탈중앙화 훼손 시도에 어떤 페널티가 주어지는지 여과 없이 보여줬다. 암호화폐의 본격 대중화를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암호화폐는 이 관문을 넘어야 비로소 대중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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