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복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갖춘 정부가 '정의롭고 좋은 정부'
이학영 논설실장
[ 이학영 기자 ] 거침없는 화법으로 구설수를 일으켜 온 여당 대표가 또 뉴스를 탔다. 대통령이 ‘신(新)남방정책’에 한참 공을 들이고 있는 와중에 이 지역 국가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해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나흘 전 한 행사에서 “필리핀은 지난 40~50년 동안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제일 잘살던 나라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정치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지만, 필리핀 정부와 국민들은 듣기 불편했을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미국과 중국 수준으로 격상시키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이 막 이 지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여서 “대통령의 외교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말을 업(業)의 도구로 삼아야 하는 정치에서 크고 작은 말실수를 온전히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때를 분별해서 말을 삼갔다면 좋았겠지만, 실언일 수도 있는 말에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다. 정작 짚어야 할 것은 지금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이 ‘대한민국과 세계의 절기(節氣)를 제대로 읽어내서 국정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철부지(不知: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는 사람)’라는 말은 ‘계절의 변화, 곧 절기(철)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서 유래했다. 농경이 주종산업이던 시절, 절기를 몰라 농사를 망쳐선 안 되므로 ‘철부지’는 금기어(禁忌語)였다. 농사꾼들 못지않게 ‘때’에 맞추는 게 중요한 직업이 정치다. 국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나라 밖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큰 국면을 먼저 읽은 뒤 그에 맞춰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지속가능하게 이뤄낼 정사(政事)를 펴 나가야 한다.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질서를 세우는 일, 외적의 침탈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 산업과 물산을 장려하고 나라곳간을 든든히 해 배곯는 국민이 없게 하는 일, 학문을 널리 일으키고 품격 높은 문화예술을 고루 즐기게 하는 일은 다 중요하다. 하지만 나라가 처한 때와 상황에 따라 어떤 일부터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시행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현인(賢人)으로 기억되는 동서고금의 정치지도자들은 맡겨진 정무(政務)의 사리를 잘 분별해 때에 맞는 국정운영을 했고, 그를 통해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튼튼하게 다졌다.
그런 점에서 국정책임을 맡은 정치지도자들은 국정 우선순위로 설정한 게 적절한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정 관심사가 경제보다는 정치·사회 분야 과제에 쏠려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 문 대통령과 여당은 더욱 그렇다. 산업생산 투자 소비 고용 등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급속히 악화되는 가운데 홀로 수출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반도체 부문에서마저 둔화 신호가 뚜렷해졌지만, 정부는 ‘위기’라는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나라 곳곳에선 ‘쓸 만한 일자리’를 놓고 계층·세대 간에 핏발 선 다툼이 확산되고 있는데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제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자동차와 조선 등 제조업이 살아나고 있다”는 대통령 발언까지 나왔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 과제를 정치·사회 분야의 뒷전에 놓고 있음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신산업 육성에서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 같은 사회주의국가들에까지 뒤처지고 있는 데서 분명해진다. 이들 분야를 키워 새 일자리를 늘려 나가겠다는 ‘혁신성장’ 정책을 내놓긴 했지만, 민관합동조직으로 출범시킨 혁신성장본부를 5개월이 넘도록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하고 있다.
“정의로운 정부가 되려면 먼저 좋은 정부가 돼야 한다. 좋은 정부가 되기 위해선 국민행복에 충실해야 하고, 그런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조지 워싱턴 등과 함께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 4대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정의’를 시대정신으로 삼고 있는 문재인 정부이기에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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