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그리스 비극읽기 (28) 정의(正義)
비극 '안티고네'의 질문
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자신으로선 최선이겠지만
다른 모든 사람에도 최선일까
두 종류의 정의
공동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도시와 법의 우월성을 강조
vs
반역자에 대한 장례를 통해
국가의 이익이 개인이익에 앞선다는 이데올로기에 도전
《안티고네》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양심에 관한 드라마로 해석돼왔다. 테베의 독재자 크레온이 상징하는 무작위적이며 비도덕적인 법에 대항하는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여인 안티고네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말이다. 안티고네는 인간의 양심대로 행동하며 국가라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권력 앞에서 투쟁한다. 이런 해석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 등장한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했다. 국가는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개인들의 집합체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 간 ‘사회계약’이 이익집단의 이익을 위해 중요했다. 안티고네를 주인공으로, 크레온을 악당으로 여기는 해석은 지난 300년간 서양에 지속돼온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전통이다.
개인과 국가
소포클레스는 정말 이런 단순한 이원론적인 주제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달하려 했을까? 기원전 441년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이 비극을 감상하던 시민들은 크레온이 상징하는 국가를 악의 축으로 생각했을까?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극 중 대결이 아테네인들을 흑백진영으로 나눴을까? 안티고네의 행위는 자신의 양심보다는 단순히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고대 관습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닌가. 이 두 인물 사이에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합창단은 인간보다 놀라운 존재는 없다고 노래한다. 인간은 땅, 바다, 심지어 자신의 운명까지 지배한다.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인간은 도시 안에 거주하고, 도시의 법을 따르는 존재다. 인간은 도시 공동체의 일원이며, 도시는 가장 이상적인 법이 실현된 장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든 도시국가는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선(善)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의 실현이다. 모든 공동체가 선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모든 공동체의 으뜸은 국가 또는 국가 공동체(politike koinonia)다.” 플라톤의 《국가》도 마찬가지다. 사회, 공동체, 국가 그리고 도시의 이상은 개인의 이상과 동일하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는 선을 파괴하는 부조화, 혹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 죄명이었던 ‘오염’이다. 도시국가 공동체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국가가 사라지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를 지배했던 국가의 권위와 위상을 인식해야 《안티고네》와 소포클레스의 생각을 정확하게 조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소포클레스를 인간 양심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간의 의무를 고취시킨다. 인간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의무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행위가 도시국가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현실과 갈등을 일으킨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도덕의 상징이다. 안티고네는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인간 운명의 이중성에 대항해 용감하게 자신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가장 숭고한 창조물이지만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햄릿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 인간은 모든 영광을 누리지만 정작 햄릿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복수의 희생양이 돼 불명예스럽게 산다. 소포클레스는 인간 운명의 엄중함과 장난을 그가 남긴 7편의 비극에서 일관되게 묘사했다.
선한 사람은 정의를 추구한다. 소포클레스의 정의 실천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인간관계에서의 조화와 과잉 금지다. 둘째는 신의 조화로운 중용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셋째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그런 자신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처럼 최상의 인간은 저주받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영웅적인 인간은 자신이 처한 운명적인 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
두 종류의 정의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 위에 아테네의 흙 세 줌을 뿌려, 아테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땅의 법’을 고의적으로 어긴다. 그녀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라’는 신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거룩하며 죽은 후에도 불변한다. 그러므로 산 자는 죽은 자에게 정성스러운 의례를 행함으로써 영혼이 불변한다는 진실을 수호해야 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고의적으로 방치해 이 진실을 폐기할 수 없다. 이것이 정의다.
그러나 크레온은 정의가 아테네의 법과 일치한다고 확신한다. 크레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최선의 공동체인 아테네의 법률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서로 다른 정의가 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정의는 각자에게 절대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존재 이유다. 학자들은 고상하고 신적이며 영원한 법과 일시적이며 문서화된 법률의 갈등으로 《안티고네》를 해석한다. 그러나 도시의 법률보다 상위 개념의 자연적이며 신적인 법은 없다. 아테네 법정에 정의의 여신인 ‘디케(Dike)’가 앉아 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법정에 있는 디케의 판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다.
안티고네가 테베의 일곱 성문을 침공해 반란을 일으킨 오빠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아테네 디케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의’ 그 자체다. 테베의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의의 상징인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방치하라는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에 의해 필요하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오래된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우리는 《안티고네》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정의를 목격한다. 크레온은 점점 자신이 선택한 정의와 모두를 위한 최선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안티고네의 고의적인 불복종은 국가를 위한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치명적인 오만을 부추긴다. 이 비극을 보고 있는 아테네 시민들은 하루 종일 아테네 도시의 여신 아테나의 상을 세우고, 신전을 짓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크레온과 안티고네 사이에서 첨예하게 갈등하는 도덕적 모호함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복잡하고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선택에 대해 숙고하도록 인도한다.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연인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 하이몬은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스스로 사고해 결정한다. 그는 안티고네가 오빠에 대한 사랑과 기록되지 않은 신들의 법에 대한 존경심으로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려는 의지를 목격한다. 하이몬은 이 비극을 보는 아테네 시민들과 이 글을 읽는 우리들처럼 안티고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안티고네의 여동생 이스메네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안티고네에게 테베 시민에 대항해 행동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녀는 “우리는 여자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오히려 가부장적인 푸념을 쏟아 놓는다. 기록되지 않은 신의 법에 승복하는 것이 영예롭고 자연스럽지만, 신들의 법들을 모아 최선을 위해 기록된 도시의 법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에게 아테네의 법은 이기심에 근거한 무작위적인 관습과 전통의 표현일 뿐이다.
모호함
크레온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도시와 법의 우월성을 노래한다. “불복종보다 심한 잘못은 없다. 불복종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우리의 가정을 무너뜨린다. 만일 사람이 인간답게 산다면, 그 이유는 법이 그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하이몬은 아버지의 말에 허점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크레온의 주장이 과도하다는 점이다. 크레온은 “국가가 정한 위치에서 사람은 그 명령이 옳거나 심지어 옳지 않을 때도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옳지 않을 때도’에서 풍기는 크레온의 자기기만과 도취에 빠진 절대적인 믿음은 기록되지 않은 신들의 법과 기록된 도시의 법을 초월하는 최고의 법으로 군림한다.
크레온은 루이 14세가 말한 “짐이 곧 국가”라는 오만에 빠졌다. 자신만이 지혜롭고 자신의 웅변술과 생각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인간은 완벽한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한다. 숙고와 중용, 자기 인식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의식하는 능력이 크레온에게는 없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은 인간의 연약함과 판단의 한계를 감동스럽게 연기한다. 국가를 위해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자만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으로 정의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억압하고, 정의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추구만이 옳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안티고네의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 크레온의 주장과는 다른 정의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싸움은 선과 악, 혹은 개인 양심과 국가 권력의 투쟁이 아니다. 《안티고네》에 담긴 지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이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공포와 전율’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모호하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만나는 다양한 윤리적·도덕적 책임과 해결 방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이 비극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자신에겐 최선이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최선인가?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에서 ‘가르치려는 교훈’은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최선을 고민하지만 이상, 연민, 자유와 같은 소중한 가치 때문에 그 최선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상황이 인생이며 비극이다. 개인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은 생각, 즉 숙고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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