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지혜로운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 한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직접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볼 수 있게 해주는 힘, 사물 너머의 사물을 보고 마음 너머의 마음을 볼 수 있는 힘이라 믿는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우물이란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여름 곤충에게는 얼음을 설명할 수 없다. 곤충은 여름이라는 시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편협한 지식인에게는 진정한 도(道)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자기가 알고 있는 가르침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장자》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보는 만큼만 이해하고 아는 만큼만 사유한다. 책을 읽고, 여행하고, 경험을 권하는 이유가 다 여기 있다.
나이가 들어 열어야 할 것은 지갑뿐만이 아니다.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눈과 귀를 활짝 열자. 내 생각이 늘 옳고 내가 보는 세상만이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동이 없다.
밖을 향해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흩어지고 떠나게 된다.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진실의 눈이 깨어나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隨處作主), 그 서는 곳 모두가 참된 곳이다(立處皆眞).
오늘 아침의 화두는 주인 되는 마음, 주인 되는 삶이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어느 스님 이야기를 했다. 길가다 떨어진 휴지를 줍는 사람에겐 온 거리가 그의 것이요, 앞산 소나무를 가꾸는 사람에겐 온 산이 다 그의 것이다.
어느 겨울 잡목에 가려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소나무를 보고 눈 쌓인 산에 올라 잡목을 정리했다. 그 순간 그 산은 나의 산이 됐다. 주인 되는 삶은 이렇게 어렵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언제나 능동적으로 그 삶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온 우주가 그의 것이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제각각이어서, 어떤 이는 이슬처럼 살고자 하고 어떤 이는 연꽃처럼 살기를 원한다.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어쩌지 못하는 삶도 있고,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힌 현실적 삶도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상황과 가치관의 문제다.
굴원과 어부의 고사를 떠올려본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그 물 탁하면 내 발을 씻으리라’가 정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군자는 화합하되 붙어 다니진 않고(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붙어 다니되 화합하지 못한다(小人同而不和)’는 논어 구절도 크게 와 닿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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