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장비 수입 까다로워
한국선 낮은 수준 임상만 가능
자율車 등 신기술 반영 못해
오래된 韓-EU FTA 개정 필요
[ 설지연 기자 ]
“한국은 오래된 안경을 쓴 채 이전에 없었던 혁신 기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영국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줄리엔 샘선 한국지사장은 27일 이같이 말했다. 과거의 잣대로 현재의 혁신을 재단하는 일이 잦다는 비판이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가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연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신약 평가를 위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자료를 2006년 2만5000달러에서 10년 넘게 업데이트하지 않아 3만달러를 넘어선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마치 13년 된 안경을 쓰고 혁신을 평가하는 상황에선 환자들에게 혁신적인 신약을 제공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ECCK는 이날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유럽 기업들의 애로사항 123건을 담은 ‘2018 백서’를 발간했다.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ECCK 회장(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사장)은 “한국에선 여러 법률과 규제가 너무 빨리 바뀌는 탓에 기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새 정책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로 또 다른 정책이 시행되면서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ECCK 회원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국에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를 비판했다. 실라키스 회장은 “자동차업계에서 한국은 독특한 시장”이라며 “한국에선 자동차 지상 높이(지상과 차량 바닥 간 간격)가 12㎝로 제한돼 있는데 유럽엔 이런 규제가 없다”고 말했다.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규제 개선 요구가 잇따랐다. 샘선 사장은 “백신 테스트를 유럽 현지에서 했는데 한국에서 또 한 번 해야 하는 것은 비용과 시간을 버리는 것으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또 “신약 임상시험을 하려면 새로운 기기를 들여와야 하는데 연구개발(R&D) 장비에도 일반 수입품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유럽 제약사들은 한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임상시험밖에 진행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식품 분야에선 국제 기준에 비해 유독 엄격한 한국의 ‘천연 표시’ 자격 기준이 소개됐다. 카스텐 퀴메 네슬레코리아 대표는 “사과를 쪼갠다고 성질이 변하는 게 아니듯 퓨레를 만들어도 자연식품이 달라지는 게 아닌데 이를 60도 이상 가열하면 더 이상 ‘천연’ 딱지를 달 수 없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에 체결된 한국과 EU의 무역협정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크리스토프 하이더 ECCK 총장은 “한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의 협정은 2005년 발효돼 13년이 됐고 한·EU FTA도 7년이 됐다”며 “그 사이 자율주행차, 빅데이터, e커머스 등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바꿔놨는데 기존 협정은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 EU대표부 대사는 “백서가 점점 두꺼워지고 건의사항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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