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서 이주한 30대 英 작가
다음달 9일까지 근작 20점 전시
식민주의의 어두운 잔재와 이주자에 대한 차별 풀어내
과거·현재·미래 역사 화해 위한 '촉매 예술'로서 가능성 제시
[ 김경갑 기자 ]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스카 무리조(32)는 아시아권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미국 ‘루벨패밀리 컬렉션’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루벨패밀리 컬렉션’은 미국의 호텔 사업가 돈 루벨과 메라 루벨 부부가 50여 년에 걸쳐 축적한 방대한 소장품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사립 컬렉션을 자랑한다.
무리조가 이들 부부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2012년이다. 당시 미국 뉴욕 인디펜던트 아트페어를 찾은 부부는 무리조의 작품을 보고 “뉴욕의 천재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 이후 처음 보는 엄청난 에너지”라고 찬사를 터뜨렸다. 루벨 부부는 당장 햇병아리 화가에게 스튜디오를 제공하고 미국 첫 데뷔전도 주선했다. 무리조의 전시는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미국과 유럽 화단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세계 정상급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도 그의 작품에 반해 2011년작 회화 ‘무제’를 뉴욕 필립스경매에서 치열한 경합 끝에 40만1000달러(약 4억2000만원)에 낙찰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무리조의 국내 첫 개인전 ‘캐털리스트(Catalyst·촉매)’는 회화와 영상, 설치 작업을 넘나들며 짧은 기간 당당히 스타 반열에 오른 그의 예술세계를 중간 점검하는 자리다. 두 개의 전시장(K2, K3)에는 드로잉 ‘비행(flight)’ 시리즈와 낙서화 같은 회화 ‘촉매’, 빨래처럼 설치한 검은 천 작업, 비디오 영상 등 지난 6년간 작업한 작품 중 대표작 20여 점을 골라 걸었다.
지난 1일 전시장에서 만난 무리조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물건이나 오브제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한다”며 “11살에 가족과 함께 콜롬비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착 혹은 안주의 불가능성’을 색채 언어로 되살려냈다”고 말했다.
그는 버려진 사탕 껍질이나 통조림 라벨 등을 회화에 편입하거나 현란한 색채를 병치해 특유의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재봉틀로 캔버스를 이어 붙이고 다리미로 캔버스를 펴고 물리적인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붓 대신 막대기를 활용해 표면을 칠한다. 그렇게 덧칠하고 휘갈기고 긁어낸 것들은 짜깁기한 캔버스 위에서 격렬하게 춤을 춘다. 작가는 “남미와 유럽 등을 여행하며 일상 풍경 내에 잠식돼 있는 식민주의의 어두운 잔재,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 등을 풀어냈다”며 “과거, 현재, 미래 역사와 화해를 위한 ‘촉매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같은 선율이 촉촉이 배인 그림 ‘촉매’ 시리즈는 이주자들의 심리적인 불안감을 역동적인 에너지로 변주한 작품이다. 절제된 색채와 대비되는 필선으로 인간의 역동적인 의식과 몸짓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강렬한 필선과 잔잔한 색채의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과의 소통을 꾀하면서 ‘액션페인팅의 힘’을 보여준다. “회화 제작 과정은 신체의 시스템을 활성화시켜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라고 하는 그의 예술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행기 혹은 호텔에서 이동 시간의 흔적을 종이 위에 수놓은 드로잉 작품 ‘비행’ 시리즈도 눈길을 끈다. 복잡한 생각을 두뇌로부터 자동 다운로드해 볼펜으로 스케치한 것이 이채롭다. 화면에 등장하는 비행 경로, 지도, 기호, 이니셜 등은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모종의 질서를 끌어낸 ‘강박의 낙서’로 읽힌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무리조는 영국 웨스트민스터대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한때 중등학교 교사로 활동한 그는 2012년 영국왕립예술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미술에 뛰어들었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전시관과 2016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아제르바이잔 바쿠 야라트 현대미술관·독일 하우스 데어 쿤스트 뮌헨·프랑스 보르도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 국제 미술계의 박수를 받았다. 전시는 내년 1월9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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