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국가애도의 날'…뉴욕증시 하루 휴장
대통령 전용기 보내 운구, 텍사스 바버라 여사 곁에 안장
자신을 '바보'라던 클린턴에 "비판에 낙담 말라" 응원 편지
[ 이현일/정연일 기자 ]
‘아버지 부시’로 불려온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94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타계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텍사스주(州) 휴스턴의 자택 침대에 누워 장남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스피커폰으로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 눈을 감았다. “아주 멋진 아버지셨어요. 사랑해요 아버지”란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나도 사랑한다”고 답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전했다. 아버지 부시와 아들은 41대와 43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 미국 역사에서 2대와 6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 부자에 이어 두 번째 부자 대통령이다.
부시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텍사스와 워싱턴DC에서 각각 열리며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장례식이 열리는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했다.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거래소는 이날 휴장하기로 했으며, 시카고상품거래소(CME)도 장례식 당일 미국 주식상품 거래를 중단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의 시신을 워싱턴DC 의회 의사당으로 운구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기를 텍사스로 보냈다. 장례식 후 부시 전 대통령은 73년간 자신과 함께하고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바버라 여사가 묻힌 텍사스주 부시도서관·기념관에 안장될 예정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세계 정치·외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NHK방송은 “미국과 옛 소련 대립의 종지부를 찍은 대통령”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맡아 ‘강력한 미국’을 외친 레이건의 뒤에서 꾸준히 옛 소련과 교섭했다.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한 해인 1989년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몰타 선언’으로 냉전을 종식시켰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사태에도 개입해 성과를 거뒀다. 베트남 전쟁처럼 수렁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를 무릅쓰고 40만 명의 미군을 포함해 영국과 한국 등 38개국 연합군이 전쟁에 참가토록 했다. 쿠웨이트를 수복하는 데 나흘 걸렸고 전쟁을 6주 만에 끝냈다. CNN방송으로 생중계된 걸프만의 ‘사막의 폭풍’ 작전은 탈냉전 시대 미국의 힘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전 대통령을 ‘단일 임기로 끝난 가장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외교적 성과를 냈음에도 부시 전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전 정부 시절부터 누적된 무역·재정적자에 전쟁을 치르느라 경제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기간 자신을 겨냥해 ‘바보(stupid)’라는 구호를 사용한 클린턴 전 대통령을 감싸안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다. 그는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남긴 편지에 “앞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비판으로 힘든 시기가 있겠지만 결코 낙담하거나 경로를 이탈하지 말라”고 썼다. 또 “당신의 성공은 미국의 성공이다.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힘을 실어줬다.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1972년 미·중의 ‘핑퐁외교’로 긴장이 누그러진 직후인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베이징 주재 미국 연락사무소 소장을 맡아 사실상 초대 주중 미국대사 역할을 했다. 1989년 중국 톈안먼(天 安門) 사태 등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큰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 악연이 있는 일본과도 협력관계를 잘 이끌어냈다. 항공모함 전투기 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부시 전 대통령은 작전을 벌이던 중 일본군의 대공포에 격추당한 뒤 4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다.
이현일/정연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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