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경제철학 전환' 의 마지막 기회

입력 2018-12-05 17:49  

가난은 '청구권력' 아닌 '극복해야 할 시련'
베네수엘라 경제 궤멸시킨 건 '이념의 폭정'
무엇이 '진정한 희망사다리'인지 돌아봐야

이학영 논설실장




[ 이학영 기자 ] 며칠 남지 않은 올해 ‘세계사적인 기록’이 예약돼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궤멸 성적표다. 올해 이 나라의 경제 규모가 5년 전의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 게 확실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올해 성장률이 -18%(IMF 추정)로 3년 연속 두 자릿수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한 결과다. 베네수엘라는 1950년까지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GNI)이 미국, 스위스,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높았다. 풍부하게 매장된 유전 덕분이었다. 그랬던 나라가 이렇게까지 고꾸라진 건 전례가 없다.

베네수엘라는 그동안 외국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고, 이웃 콜롬비아처럼 내전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1년 내내 활동 가능한 날씨에 대형 자연재해를 겪은 적도 없다. 유전이 고갈된 것도 아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천혜(天惠)의 환경이다. 이렇게까지 축복을 받은 나라는 별로 없다. 그런데도 신기루처럼 무너져 내렸다. 2014년 말부터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다른 산유국들도 타격을 받긴 했지만, 베네수엘라처럼 침몰하지는 않았다.

“나쁜 이념 탓이다. 그 밖의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미국 역사비평가인 대니얼 파입스가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내린 진단이다. “사회주의 실패가 세계적으로 증명됐는데도 우고 차베스 이후 베네수엘라 정부는 사회주의 실험을 고집했다.” 차베스는 1999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민간 기업의 재산을 몰수하고, 엘리트 기업인과 관료들을 제거하고, 반대파 인사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14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1조달러를 신산업 육성과 신기술 개발지원에 쓰지 않고, 온갖 복지예산 지출로 탕진했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가난을 ‘극복해야 할 시련’이 아니라, ‘당당하게 손을 벌릴 청구권력’으로 각인시켰다. 유전 외에 경제를 받쳐줄 산업과 기업을 키우지 않은 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의 흥청망청 퍼주기가 다다를 길은 뻔했다. “모든 폭정 가운데 최악의 폭정은 무자비한 이념의 폭정이다.” 파입스가 인용한 역사학자 폴 존슨의 경구(警句)다.

여러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게 많다. 닮은꼴로 보이는 조짐도 없지 않다. 미국 일본 등 주요국들이 탄탄한 성장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한국만 잠재성장률에조차 못 미치는 ‘나 홀로 부진’을 겪고 있는 것부터 심상치 않다. 엊그제 한국은행의 3분기 성장률 발표(전 분기 대비 0.6%)는 우리나라가 올해 정부 목표치인 2.9%는커녕 2.7% 성장도 힘들어졌다는 경고를 담았다.

한국보다 경제덩치가 12배 큰 미국은 올해 3%대 성장이 확실하다. 일본도 기업들이 일손을 구하지 못할 정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주요 교역상대국들의 호황을 함께 누리지 못했다면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났다는 얘기다. 한은 통계는 ‘고장 난 곳’이 어딘지를 정확하게 보여줬다. 투자 소비 등 내수의 급속한 침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1년7개월 동안 정책의 초점을 맞춰온 게 내수 육성(소득주도 성장)이었으니, 이 성적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졌다. 정부가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을 때는 지났다. 쪼그라든 경제로 인해 청년에 이어 중장년까지 실업자 급증의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 꽉 막힌 국내 ‘규제감옥’을 탈출해 해외로 떠나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 발언 가운데 “한국 사회 곳곳에 희망사다리가 튼튼하게 구축되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말은 그래서 눈길을 끌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희망사다리’는 무엇일까. 그의 멘토였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펴낸 저서 《경제철학의 전환》을 차분하게 읽어볼 것을 권한다. “케인스식 단기수요 창출보다는 기업가의 혁신을 유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최우선 정책목표를 창의와 혁신이 가능한 경제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경제가 탁상공론의 이념정치에 발목 잡힐 것을 예견한 것일까. 변 전 실장은 이런 당부도 했다. “구체성은 당파성을 뛰어넘고, 명백한 팩트(사실)는 정제되지 않은 이념을 부끄럽게 한다.” 이 말도 되새겨 보기 바란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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