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낙훈 기자 ] 독일은 미텔슈탄트(중견·중소기업)의 나라다. 글로벌 대기업은 벤츠 BMW 폭스바겐 보쉬 지멘스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하지만 중견·중소기업은 다르다. 세계를 주름잡는 중견·중소기업의 거의 절반이 독일에 있다. 전 세계 2734개 히든챔피언(글로벌 강소기업) 중 47.8%인 1307개가 독일 기업이다.
독일 중소기업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현장 중심의 인력 양성, 긴밀한 산·학·연 협력연구개발체제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기업과 정부가 혼연일체가 돼 ‘미래 먹거리’를 준비한다는 점이다.
독일 연방정부는 4년 단위로 ‘하이테크(첨단기술)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2006년, 2010년, 2014년에 이어 올 9월 ‘하이테크전략 2025’를 발표했다. 여기엔 사회과제 해결, 미래역량 강화, 개방형 혁신 등 크게 세 가지 부문에 관한 비전이 담겨 있다.
獨, 연방정부가 혁신동력 역할
비전은 비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천 로드맵이 구축돼 있다. 예컨대 사회과제 해결엔 헬스케어, 에너지, 모빌리티 등 6개 분야 실천 과제를 담고 있다.
개방형 혁신에는 연방정부의 혁신동력 역할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위해 연간 3500억유로(약 455조원)에 이르는 공공자금을 경제혁신의 인센티브로 활용한다는 항목도 있다.
이번에 발표된 하이테크전략 목표 중 주목할 만한 건 ‘기존 시장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 제품과 서비스 창출’이라는 대목이다. 그동안 독일 기업은 ‘개선을 통한 고급화’에는 강점이 있었지만 ‘파괴적 혁신’ 사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마저도 선도하자는 것이다. 이 전략은 과학·기술·산업정책을 아우른다는 특징이 있다. 일관성도 있다.
최근 국내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9월 중소제조업 가동률은 72.5%로, 1년 전에 비해 1.7%포인트 떨어졌다. 동남권의 러스트벨트화에 이어 전국 최대 중소제조업 밀집 지역인 남동·반월·시화산업단지 가동률도 70% 안팎에 머물고 있다. 가동률만의 문제가 아니다. 채산성은 더 큰 문제다. 경제 대들보인 자동차 분야 부품업체들의 수익성 악화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경쟁력 제고 위한 로드맵 필요
게다가 기업에 짐을 지우는 각종 정책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적극적인 투자와 고용은커녕 해외로 공장 이전을 추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올 2분기 해외 직접투자액(송금 기준)은 전년 동기보다 25.8% 증가한 129억9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이 기간 신규 투자 법인 수는 전년 동기보다 5.5% 늘어난 945개사에 달했다. 베트남 호찌민과 하노이에는 투자처를 물색하는 중소기업 사장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말이 해외 투자지 사실은 탈출에 가깝다.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해 민관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독일과 공장 해외 이전을 서두르는 한국. 이른바 제조업 강국이라는 두 나라의 대비되는 모습이 연말 풍경을 쓸쓸하게 장식하고 있다.
우리도 부처 울타리를 벗어나 과학·기술과 산업을 아우르는 정교한 정책이 필요하다. 특히 미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미래 먹거리에 목말라하는 중소기업을 위한 현실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 초점은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여야 한다. 그래야 중소기업들에 작은 희망이라도 던져줄 것 아닌가.
nhk@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