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좋은 소설은
내용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씬짜오, 씬짜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젊은 날의 초상'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모두 제목에서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제목 만드는 것도 창작
여러분은 어떤 제목을
붙인 소설을 원하나요?
제목이 좋은 소설은 내용이 궁금하게 만든다. 인상 좋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 자체로 독자의 이목을 끈다면 절반은 성공한 제목이며 다 읽고 나서 작품에 딱 맞다 싶으면 온전히 성공한 제목이다. 제목에 집중하며 소설을 읽어 보자.
‘씬짜오, 씬짜오’(최은영, 2016년)의 화자인 ‘나’의 가족은 독일에 체류하던 시절 베트남 출신인 투이네 가족과 교류한다. 투이는 ‘나’와 같은 반 급우였고 투이의 아버지 호 아저씨는 아빠 회사의 동료였다. 두 가족은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함께 식사하고 교류한다. 어른들은 밤새 카드놀이를 하고 ‘나’는 투이와 만화책을 보거나 직소 퍼즐을 하며 애틋한 우정을 쌓는다.
외부와 고립돼 육아에만 매달려 있던 엄마도 투이네 집에 초대받은 날에는 예쁘게 차려입고 행복해했고 사이가 냉랭했던 아빠와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두 가족은 어느 저녁 식탁에서 베트남 전쟁을 화제에 올린 일을 계기로 멀어진다. 호 아저씨는 베트남 전쟁 때 한국인이 저지른 학살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고 ‘나’의 아버지는 그것은 전쟁 상황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맞섰다. 그 전쟁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투이의 엄마 응웬도, 참전한 형을 잃은 ‘나’의 아빠도 당시에는 어린 아이였을 뿐이다.
이후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성인이 된 ‘나’는 몇 번이나 독일 출장을 가도 그 마을을 찾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엄마가 떠났을 때 엄마를 위해 울어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모들조차 어릴 때부터 우울했다거나 영리한 애는 아니었다는 식으로 엄마를 회상했다. ‘나’는 엄마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던 응웬 아줌마를 떠올렸다. 독일 시절을 다 잊었다고 했던 엄마. 그러나 자신의 예민한 기질을 섬세함이나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가 잊었을 리 없다. 다시 찾은 마을은 기적처럼 옛날 그대로였고 응웬 아줌마는 그때의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엄마를 빼닮은 ‘나’를 역시 기적을 보는 사람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씬짜오, 씬짜오. 우리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한다. 다른 말은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는 베트남어로 ‘안녕’이라는 뜻이다. 이 단편에서 ‘씬짜오’는 세 번 등장한다. 처음 ‘나’의 가족이 투이네를 방문했을 때, 독일을 떠나기 전날 ‘나’가 투이 모자와 작별할 때, 그리고 마지막이 ‘나’와 응웬 아줌마가 재회했을 때다. 작품을 읽어내려 가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독자들은 소리 내어 발음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씬짜오 씬짜오. 정말이지 이 소설에 이 이상의 제목이 있을까 싶다.
‘내 아들의 연인’(정미경, 2006년)은 계층이 다른 젊은 남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부유한 중산층 주부인 ‘나’가 아들의 가난한 여자 친구를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을 다루고 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자신에게 순정을 바치는, 그러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을 버리고 현재의 남편을 택하였다. 조심성 없는 딸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는, 테라피 마사지와 백화점 쇼핑이 일상인 ‘나’는, ‘결혼이라는 벤처에서 성공한 투자자’다. ‘나’는 컨테이너에 살 정도로 가난한, 아들의 여자친구 도란을 불러내어 밥을 먹이고 옷을 사준다. 도란의 가난을 귀신같이 간파한 백화점 점원의 턱에서 경멸의 표정을 읽고는 발끈하여 매장을 뒤집다시피 하여 도란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낸다. 아마도 ‘나’가 도란과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썩 안기는 얼굴이 아닌’ 도란이 아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부딪힐 오만 가지 난관을. 그리고 ‘나’가 낳아 기른 아들이 그 난관을 함께 뛰어넘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나’는 모른다. 그런 난관을 뛰어넘는 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 난관 너머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애초에 그런 난관을 피해서 현재의 권태와 환멸에 다다른 ‘나’가 아닌가.
얼핏 들으면 통속적인 TV드라마의 그것 같은, 작가가 이를 인지하고도 굳이 피하지 않고 명명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제목은 상이한 계층의 남녀가 만났을 때 전개되는 사랑의 기승전결과 그것이 결과할 생래적 통속을 직시하는 듯하여 오히려 절제된 세련미를 발산하고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6년)은 제목만 보고도 박수를 치고 싶은 작품이다. 실제 주인공이 난쟁이지만 난쟁이라는 설정 자체가 소외된 존재의 은유이니 직설이 은유를 품고 있는 매력적인 제목이다. 이 소설은 1970년대 한국 문단에 힘차게 쏘아올려진 ‘거대한’ 공이었다.
그러나 꼭 개성이 강해야 좋은 제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담담한 제목은 또 담담한 대로 미덕이 있다. ‘젊은 날의 초상’(이문열, 1981년)은 담백하고 소박한 제목이다. 등장인물들은 젊은이다운 방황과 고민을 치열하게 치러내고 있고 이 연작은 그들의 이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초상화 모음을 완성하고 있다. 유명 고전을 빌려다 사용한 제목도 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1992년)의 제목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全文)이다. 격렬한 저항 시인다운 작품이 되어 그것이 전문이기에 저항성은 더욱 선명하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 불만을 품고 범죄를 감행하면서까지 사회의 금기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주인공에게 아주 어울리는 제목이다.
좋은 제목을 붙이기 위해 작가들은 어떤 노력을 할까? 제목 만들기에 법칙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제목을 붙이는 것은 퇴고에 못지않은 지난한 작업이고 그 자체가 창작의 영역으로 보인다.
독자 여러분이 소설을 쓴다면 작품의 제목을 무엇으로 붙이고 싶으신지? 영감처럼 제목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품고 오래 고민하다 보면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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