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파멸하는 리어왕 이야기 담고 싶었죠"
"송강호 있었기에 모험 가능해"
'마약왕'은 재밌나. 연말 성수기 시즌을 맞이해 개봉된 영화 중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전개, 하지만 뒤통수를 가격하는 엔딩. 지난 19일 개봉 이후 '마약왕'에 대한 관객 평가는 호불호로 갈리고 있다.
역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 영화 1위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 충무로 대표 배우 송강호의 만남이었던 터라 유독 기대치가 높았던 탓이기도 하다. 최근 만난 우 감독은 이 같은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많은 영화가 그렇지 않나요? 100%로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죠.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자기 취향에 안 맞으면 재미없고, 허술한 면이 있더라도 취향에 잘 맞으면 열광하죠."
우 감독의 신작 ‘마약왕’은 1970년대 하급밀수업자이던 이두삼(송강호 분)이 필로폰을 제조, 일본에 수출해 마약 업계 거물이 됐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담담한 시선으로 쫓는다. 청불 등급답게 약물과 폭력 묘사 수위는 높은 편이지만, 한 인간의 흥망성쇠와 폭넓은 감정 진폭을 볼 수 있다.
우민호 감독은 두 장의 패널을 들고 브리핑을 하듯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 사진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작품은 한국 마약사범들의 이야기를 이두삼 하나로 엮었다. 우민호 감독이 '증거'(?)로 제시한 인물인 이황순도 소재가 됐다.
이황순은 1979년 10·26 사태 직후인 1980년 3월 19일, 마약 판매 혐의로 체포됐다. 체포 당시 그는 머물던 별장에서 수사진과 대치를 벌이고 사냥용 총을 쏘면서 4마리 맹견을 풀어 저항했다. 그는 실제로 히로뽕 중독자로 알려졌다. '마약왕' 엔딩 속 이두삼의 설정과 많이 닮아있다.
우 감독은 "실화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충실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진을 보고선 마약 제조 공장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마약왕'의 자택의 마당에 장미꽃도 심었다. 영화에서처럼 8명의 형사가 수갑만 가지고 들어갔다가, 총을 쏘는 바람에 나왔고 경찰 특공대 35명이 총격전 끝에 검거하는 지점도 같다"고 강조했다.
우 감독은 '마약왕'에 대해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한 인물이 이웃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파멸해가는 성 안에 갇힌 리어왕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가 좀 그런 부분이 있다. 극단적 상황에 몰아붙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너무 많이 해서 차기작 '남산의 부장들'까지만 하려고 그만두려고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의 말처럼 이두삼의 말로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없고, 돈도 많지만 쓸 곳이 없고, 집안에만 갇혀 있다. 그런 모습을 미친 리어왕같은 연극처럼 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마약왕' 후반 10분간은 마치 송강호의 모노드라마다. "연극처럼 끊지 않고 그대로 보여 시켰다. 좋아할 사람도 있을 것 같고, 별로일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재미가 있지 않나? 모험적인 작품"이라고 분석했다.
우 감독은 "그 장면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지만, 죄송하게도 송강호 선배를 도와줄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제가 마약을 해 본 것도 아니고 알 수도 없었다"면서 "전적으로 선배가 하셔야 하는 거다. 별다른 디렉션을 안 했다. 현장에서 이겨내셨더라"라고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자료 조사를 많이 했지만 사실 체화되지 않았다. 술을 먹더라도, 반응이 다 다른데 마약도 다 다르다. 그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단순히 '이 약을 먹고 '뿅' 간다' 이런게 아니다. 우리의 마약왕은 그런 표현이 아니고, 이두삼의 인생의 흔적들이 나와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 편집본을 본 순간에 대해 그는 "제가 첫 관객 아니냐. 보자마자 소름끼쳤다. 대사도 내가 쓴건데 송강호 선배가 이걸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그런데 소름이 쫙 돋는거다"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마약왕'이라는 제목 처럼 영화는 마약, 히로뽕을 제조, 판매하는 사회 악에 대한 이야기다. 워낙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배우 송강호가 '마약왕' 이두삼으로 스며든 탓에 사회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이야기에 관객이 연민을 가지게 될까하는 걱정도 있었다.
이 때문에 우 감독은 작중 인물과 관객과의 거리를 중시했다. 그는 "밸런스를 잘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연민의 시선을 유지는 하되 적정 거리감을 계속 두려고 했다. 관객이 그 인물에 빨려들어가면 그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인물과 나와의 거리감이 좁았다 멀어지는 부분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고 분석했다.
로비스트 김정아 역의 배두나, 아내 역의 김소진 등 여성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 지점 중 하나다. 우 감독은 "그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들보다 그나마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남자들은 광기에 휩쓸려 멈출 줄 모르지만 여성들은 멈출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두삼 외 다른 캐릭터들이 작품 중반 모습을 감추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우 감독은 "이두삼의 모험담을 이야기 하고 싶어 많은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쭉 가는 것이 아니라 치고 빠지기를 바랐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은 다 다르지만 결국 아무도 없고 이두삼 혼자 남게 되는 구조를 갖고 가고 싶어 그랬다"고 해명했다.
왜, 하필, 1970년대가 배경일까. 우민호 감독은 "희망차게 경제발전 하며 항쟁도 하고, 독재는 심해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총 맞아 쓰러지는 격동의 시대였다. 마약왕이 되고 자멸하는 부분도 뗄 수 없었고, 같은 궤적으로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우 감독은 시대상을 영화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캐릭터 뒤로 흐르는 TV 화면 속에 박정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었다. "적극적으로 시대상을 드러냈다면 '내부자들'이 됐을 것이다. 은유적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화면도 나오는데, 특별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마약왕'은 미국의 인기 드라마 '나르코스' 등 타국의 마약 소재 이야기와는 결을 달리 한다. 우 감독은 "외국의 마약왕들은 향락에 빠지고 어마어마하게 돈을 뿌리며 살다가 파멸해 가는데, 우리 마약왕은 힘들다. 밖에선 떵떵 거리다가도 집에 와선 와이프 한테 맞고 쫓겨난다. 거기다 여기 저기에 돈도 바쳐야 하고, 그게 어떻게 보면 한국적인 느낌이지 않나 싶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사를 그리는 영화는 나오기 힘들다. 다행히 좋은 기회가 왔고 송강호 선배가 선뜻 같이 하자고 해서 큰 힘이 됐다. 송강호가 있었기에 든든하고 과감하게 모험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영화에서 이두삼에 대해 "모두가 미워하고, 모두가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조정석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우 감독은 "1970년이 제겐 그렇게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 부모님도 때로는 모든 게 좋다가 때로는 싫을 때도 있지 않나. 이 영화도 모두가 미워하고 모두가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우민호 감독은 전작 '내부자들'의 성공 이후 대중의 높은 기대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존에 시도되지 않았던 대담한 방식의 전개를 따른다. "새로운 도전에 의미를 뒀다. 사실 잘 된 작품을 (흥행코드를) 답습하는 재미도 있긴 하겠다.(하하) 그래도 바로 다음 작품으로 답습하긴 좀 그렇지 않나"라며 웃었다.
우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한국 영화에서 기획될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했다."사람의 일대기를 쫓아가는 영화는 상업 영화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특히 이두삼은 악인인데 매력을 느꼈기에 하게 됐다. 모든 이야기가 가짜라면 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이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바라볼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마약왕'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영화"라면서 "이 영화가, 그 이상으로 통할지 안 통할지 기다려 보는 중이다. 다른 작품과는 색다른 재미가 분명히 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잘 되길 바라고 있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마약왕’은 송강호 외에도 조정석, 배두나, 조우진, 김소진, 김대명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해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며 캐릭터 향연을 펼친다. 총제작비는 165억원으로 400만명 이상 관람해야 제작비를 회수한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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