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보건의료 규제에 환자만 피해
혁신 의료기기 개발해도 한국선 상품화 못해 해외로
건강보험 대상 신청하면 신기술보다 의료비 절감이 우선
의료 융합기술 82% 기술평가서 탈락…의료혁신 말뿐
[ 이지현 기자 ]
삼성서울병원은 지난 10월 헬스케어 분야 아이디어를 평가하는 해커톤 행사를 열면서 사전 컨설팅 시간을 마련했다. 참가자들이 아이디어를 미리 제출하면 국내에서 사업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다. 꽉 막힌 보건의료 규제 때문에 빚어진 해프닝이다. 의료계 관계자는 “1박2일 동안 머리를 맞대고 나온 아이디어가 사업화되지 못하는 것을 줄이자는 취지였다”며 “헬스케어 분야 해커톤 행사도 한국식으로 바꿔야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겹겹이 쳐진 헬스케어 규제
국내 헬스케어 사업에 뛰어든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은 복잡한 규제 장벽을 피하느라 어려움을 겪는다. 겨우 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출시해도 막상 수익을 내는 곳은 드물다. 국내 보건의료 시스템에서 돈을 내는 주체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인데, 공단의 급여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의료기기, 의약품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더라도 보험 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심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게다가 의료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보다는 의료비를 얼마나 절감할 수 있는지 등이 평가 대상이다. 신기술을 가진 업체가 문턱을 넘기 어려운 이유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건강보험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한 로봇, 3차원(3D) 프린팅 등 의료 융합기술의 82%는 기술 평가에서 탈락했다. 이 같은 현실은 해외에 진출할 때도 발목을 잡는다. 업계 관계자는 “제품을 외국에 가져가면 ‘당신네 나라에서 사용한 경험은 어떠냐’고 묻는다”며 “한국 시장에서 규제 때문에 제품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해외 진출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했다.
알맹이 쏙 빠진 의료 모니터링
조영민 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팀이 SK텔레콤과 개발한 당뇨병 환자 관리 앱(응용프로그램) ‘헬스온G’가 대표적이다. 환자가 보낸 혈당을 토대로 인슐린 수치를 조절해주는 앱으로 지난해 식약처로부터 스마트폰 앱으로는 최고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SK텔레콤은 국내 출시 제품에서 인슐린 조절 기능을 뺐다. 의사-의료인 간 원격의료만 허용한 의료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조 교수팀은 SK텔레콤과 함께 내년 한국 대신 중국에서 모든 기능을 살린 헬스온G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진출하기 위해 아랍어 버전 제품도 개발하고 있다.
조 교수는 “단순히 환자가 혈당을 재는 것으로는 상태가 좋아지지 않지만 적절한 피드백을 하면 효과가 좋고 안전성도 높았다”며 “헬스온G를 개발한 한국에서만 이 기능을 빼고 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보건의료 규제가 보건산업 육성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환자 피해까지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는 의료서비스에 간단한 기술조차 활용하지 못해 해외로 떠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한국 업체가 개발한 기술이 해외 환자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편의점 판매약도 늘린 중국
규제에 막혀 한국이 주춤하는 사이 해외 국가들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은 2016년 인터넷 의료서비스를 전면 허용해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앞다퉈 헬스케어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알리바바는 알리페이에서 운영하는 미래약국을 통해 약사가 원격으로 문진하고 의약품을 배송하는 서비스를 내놨다. 텐센트는 지난해 인공지능(AI)으로 의사 진료를 보조하는 미잉을 출시했다. 식도암 폐암 자궁경부암 당뇨병 등을 진단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베이징시는 이달 초 감기약 등 62가지 의약품과 체온계, 혈압계 등 35가지 의료기기의 편의점 판매를 허용했다. 한국 편의점도 상비약을 팔 수 있지만 13개 품목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다. 품목 확대 논의는 약사들의 반대에 막혀 1년 넘게 지지부진하다.
일본은 원격의료와 결합한 의료서비스에 건강보험 혜택을 주고 있다. 의사 진료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원격진료를 활용하면서 노인 의료비를 절감하고 있다. 대만은 의료 빅데이터 클라우드를 구축해 중복 의약품과 중복 검사를 걸러내는 데 활용한다. 환자가 스스로 건강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에 막혀 환자가 자신의 의료 데이터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운 한국과 대조적이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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