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정치부 기자)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표현은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을 빗댈 때 자주 쓰인다. 맹수 중의 맹수인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면, 끝까지 가서 매조지를 지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칫 중간에 내렸다간 호랑이에 잡아 먹힐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요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처지를 ‘호랑이 등’에 비유하는 이들이 꽤 많다. 얼마 전 북한 및 북핵 전문가들이 내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하는 자리에 갔더니 때아닌 ‘호랑이 등’ 을 두고 가시 돋친 설전이 펼쳐졌다.
내년 정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김정은이 호랑이의 등에 탔으니, 내려오기는 힘들 것’이란 요지로 말한다.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역사상 첫 미·북 정상회담을 가졌고, 전세계를 향해 김정은 스스로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한 만큼 되돌아 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는 것이다. 핵·경제 병진노선을 포기하는 등 2020년 완성을 목표로 김정은이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운 것도 북한이 호랑이의 등에서 내려올 가능성이 없다는 전망의 이유로 거론된다. 중간 우회는 리더십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전망은 통일연구원 등 친정부 성향의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초 ‘폼페이오-김영철 회담’ 무산 이후 북한의 침묵이 길어지면서 최근엔 ‘김정은이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것이 맞나’라는 질문을 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불가역적인 상황으로까지 북핵 협상이 진전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들은 주로 2005~2007년 6자회담과 올해 북핵협상을 비교하곤 한다. 2007년 2월13일 남북과 미중러일 등 6개국은 영변핵시설 폐쇄와 불능화를 비롯해 북한 핵 프로그램 신고를 못 박았다. 이에 상응하는 대가로 북한은 에너지 100만t과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등의 혜택을 받기로 했다.
2007년의 ‘2·13 베를린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그 해 3월과 9월에 또 다시 6자회담이 열렸다. 당시 북한은 2007년 말까지 핵시설 불능화 및 핵 프로그램 신고를 약속했다. 그때 한국 언론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표현이 바로 ‘호랑이 등’이었다.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호랑이의 등에 탄 주인공이란 점만 달랐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김정일의 선택이 무엇이었는 지를 잘 알고 있다. 김정일은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어 핵무기 완성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김정은이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한 번의 미·북 정상회담을 통해 약속한 비핵화 조치는 과거 6자회담 시절과 비교하면 사실상 후퇴에 가깝다. 이미 핵을 보유한 국가가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영변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통해 ‘핵개발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도 거부하고 있다. 김정은이 호랑이의 등에 탄 것은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제3의 견해도 있다. ‘김정은이 호랑이의 등에 탄 것은 맞지만, 호랑이 굴에서 김정은을 끌어내려는 이들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류의 분석에서 핵심은 중국이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의 손에 이끌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도사리고 있는 호랑이 굴로 끌려가는 상황을 중국이 가만히 두고보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최근 북한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 것도 중국의 개입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전문가들은 평양에 ‘트럼프 타워’가 지어지는 일 만큼은 중국으로선 최대한 막으려고 한다는 데 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가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느냐다. 청와대는 김정은이 호랑이의 등에 탔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듯 싶다. 김정은이 연내엔 못 왔지만 내년엔 꼭 답방할 것이며, 2차 미·북 정상회담도 열리고, 북한은 핵폐기로 나아갈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일관된 설명이기 때문이다. 새해 한반도 정세가 청와대의 바람대로만 이뤄진다면 더 바랄 바가 없겠다. (끝)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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