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분산하는 정치
재야 양반들의 궐기…서양 열강과의 수교 반대
영남 유생 1만명 '만인소' 등 위정척사의 깃발 높이 올려
문벌家 자제들의 갑신정변…역관 오경석 통해 개화
日과 같은 급진적 변혁 추구…외세에 묶인 체제 전복 시도
수탈에 지친 농민들의 봉기…"충효 다해 세상을 구한다"
동학군, 복고적 개혁 지향…공주 우금치서 日軍에 궤멸
동학 생존자들 일진회로 재편
일본과 합방 청원 '아이러니'
천하에 가난한 정부
18세기 말 조선왕조의 재정은 쌀 200만 석(1석=100L) 규모였다. 일본식으로는 100만 석에 해당한다. 동시대 일본의 영주들이 조세로 수취한 쌀은 1500만 석이었다.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 국토는 조선의 1.35배, 인구는 2배가량이다.
비교사로 본 조선왕조는 취약한 국가였다. 19세기의 위기는 조선왕조의 재정을 위축시켰다. 1904년 대한제국의 예산은 1421만원(元)으로 1911년 국내총생산의 1∼2%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제국 재정의 실질 규모는 18세기 말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제국을 표방했으나 그 나라는 천하에 가난한 정부였다.
빈약한 재정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군국(軍國)의 주체로 자립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군대는 왕실의 수호와 치안의 유지를 위해 구식 병기로 무장하고 왕도 주변에 배치된 70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개항 이전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완강했다. 조선왕조는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庶)의 위계로 편성된 예(禮)의 국제질서를 국가체제의 근본 원리로 했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이기도 했다. 그 이유로 거의 5세기 동안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했다.
조국에 대한 슬픔
1874년 베이징을 방문한 역관(譯官) 오경석은 영국 영사관의 서기관 윌리엄 메이어스를 찾았다. 오경석은 세계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메이어스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오경석은 조국에 대한 자신의 슬픔과 우려를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3년 전 강화도를 침공한 미국 군함을 물리친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에서 더욱 의기양양했다. 대원군은 전국 요처에 “양이(洋夷)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오경석이 보기에 어리석은 짓이었다. 소수의 양반 지배세력은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완강하게 구래(舊來)의 제도와 기득권에 집착했다. 위기를 면할 유일한 방도는 스스로 문호를 열고 열강과 관계를 맺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배세력을 설득할 방도는 없었다.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목이 달아날 형편이었다.
그래서 오경석은 메이어스에게 영국이 충분한 병력과 군함으로 조선을 찾아와 꽉 닫힌 문호를 열어젖힐 것을 요청했다. 역관은 결코 국가의 대사를 책임질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 완강한 신분제의 굴레 하에서 조국에 대한 슬픔이 사랑으로 전화(轉化)하는 길은 바깥세상의 도움을 구하는 길뿐이었다.
위정척사
개항은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해체하고야 말 일대 충격이었다. 그 미증유의 위기를 당해 제후(諸侯)는 제후대로, 대부(大夫)는 대부대로, 사(士)는 사대로, 서(庶)는 서대로 분산했다. 개항기의 조선 정치사는 이 같은 시각에서야 올바로 조망된다.
영국은 오경석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에 주재한 청의 외교관을 통해 《조선책략》이란 책을 조선에 전했다. 러시아의 남진 위협에 대비해 일본, 미국과 친하게 결탁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책략》이 알려지자 조선의 사(士)가 궐기했다. 1881년 영남의 유생 1만 명이 올린 만인소(萬人疏)가 그것이다. 그들은 우리 500년 조종(朝宗)의 문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강원도 유생 홍재학은 위정척사(衛正斥邪), 곧 우리의 올바른 도를 지키고 서양의 사악한 도를 배척하는 것은 우리의 변할 수 없는 정책인데, 임금이 이를 어겨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고 주장했다. 고종을 비난한 극언은 그의 죽음을 불렀다. 그렇지만 이 나라 선비의 기개는 죽지 않았다. 홍재학의 충간(忠肝)은 뜨겁게 펄떡이며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졌다. 조선의 사는 제후의 신하이지만 천자의 신하이기도 했다. 그들이 신봉한 정학(正學)은 제후의 권위를 초월했다.
갑신정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당(開化黨)은 오경석을 통해 세계의 정세를 교육받은 문벌 가문의 자제였다. 국가체제의 위기에 대한 응전은 대부(大夫) 위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개화당은 일본의 유신과 같은 변혁을 추구했다. 2년 전 임오군란은 반일 감정의 군중이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방화함으로써 일약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일본이 출진 태세를 갖추자 종주국 청은 서둘러 한성에 군대를 진입시켰다. 그리고선 난도에 포위된 국왕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청은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세계에서 조선은 일거에 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김옥균 등은 거기에 저항했다. 그들이 준비 부족이었고 성급했다는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거사를 일본을 끌어들여서까지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벌거벗은 욕망의 정쟁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외세의 구조로 짜인 조선의 국가체제를 깨고자 했으며, 그 점에서 구래의 정쟁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 같은 비판에는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은 외세가 아니고 일본만이 외세라는 시각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다. 유래가 오랜, 균형 잡히지 못한 시각이다.
유인석과 김백선
갑신정변에서 패퇴한 일본이 조선의 조정을 장악하는 것은 10년 뒤 청일전쟁을 통해서였다. 문벌 출신이라 할 수 없는, 개화 실무에 밝은 친일 관료들이 정권을 잡고선 국가체제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다.
위정척사의 계승자 유인석은 그에 극렬 반발했다. 그는 우리의 도를 지키는 것 이외의 다른 개화는 있을 수 없다면서 개혁의 취소와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개화파 정부가 단발령을 내리자 그는 고향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휘하에는 상민 신분의 김백선을 대장으로 하는 부대가 있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실패한 뒤의 일이다. 김백선은 작전에 협력하지 않은 어느 양반 신분의 부대장을 추궁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령관 유인석은 김백선을 끌어내 참수했다.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킨 목적은 예의 국제질서로서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체제에서 사(士)와 서(庶)의 위계는 범할 수 없는 질서였다. 그런데 의병 부대 내에서 그것을 허무는 일이 발생했다. 유인석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김백선이 처형되자 유인석의 의병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와 서는 이해관계가 같지 않았다. 사끼리도 그러했다. 충남에선 송씨 가문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인근의 윤씨 가문은 외면했다. 당쟁으로 얽힌 원한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호할 국가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는 효(孝)였다.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고 하나 불효하면서까지 의병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동학군과 일진회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東學)의 일파가 관리들의 수탈에 저항해 봉기했다. 동학군이 내건 명분은 “충효를 다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이었다. 동학농민봉기는 유교적 근왕주의에 입각한 복고적 개혁을 지향했으며, 그 점에서 전래 민란의 계승이자 절정이었다.
종래 동학농민봉기를 급진적 사회개혁의 농민혁명으로 평가한 학설은 역사가들이 관련 소설을 보고 상상한 것이다. 농민군의 봉기는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관군이 동학군을 진압하지 못하자 국왕 부처는 청에 구원을 요청했다. 위험천만한 외교였다. 일본은 청과 전쟁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출병해 한성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국왕 부처와 대립한 대원군을 집정관으로 옹립했다. 대원군은 동학군 수뇌에게 한성으로 진격해 일본군을 몰아낼 것을 종용했다.
북상하는 농민군과 일본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충돌했다. 농민군 3만60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일본군 사망자는 단 1명이었다. 부적을 달면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비기의 정신세계와 신식병기의 근대문명이 부딪힌,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극이었다.
동학의 잔당은 교주 손병희의 인도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일진회(一進會)로 재편됐다. 한국사 최초로 맨 아래 위계의 서민이 이룩한 정치적 결사였다. 이후 일진회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합방을 청원한 것은 개항기의 분산하는 정치가 빚은 최대의 아이러니였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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