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혁 기자 ]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는 대부분 역사적 위인이나 무장투쟁 운동가를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총칼이 아니라 언어라는 정신적 독립운동을 다뤘다는 점에서 남다릅니다.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독립운동 이야기죠.”
오는 9일 개봉하는 ‘말모이’의 엄유나 감독(40·사진)이 밝힌 연출 소감이다. 롯데컬처웍스가 총제작비 115억원을 투입한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이 남긴 최초의 우리말사전 원고이자, 극 중 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우리말을 모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비밀작전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33명을 체포하고 2명을 옥사시킨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에 상상력을 더했다.
“당시 전국에서 자기 고장 말을 적어 조선어학회에 보냈다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놀랐어요. 역사적 사건에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데 감동했습니다. 조선어학회가 우리말사전을 만들고 공청회를 열고 우편물로 답장을 보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김판수와 류정환이란 인물을 창작했어요.”
영화는 1940년 평범한 가장 김판수(유해진)의 시선을 따라간다. 글을 모르는 까막눈인 김판수는 중학생 아들의 월사금을 내기 위해 물건을 훔친다. 하필 주시경 선생의 친필 원고가 든 류정환 조선어학회 대표(윤계상 분)의 가방이다. 이후 판수는 한글을 떼는 조건으로 조선어학회 심부름꾼이 되면서 언어의 소중함을 깨달아간다. 나아가 조선팔도에서 우리말을 모으기 위해 험난한 여정에 발을 디딘다.
“김판수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캐릭터입니다. 못나 보이거나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 우리말 지키기에 나섰음을 상징하죠. 실제 우리말사전 편찬 작업에 지식이나 계급과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으니까요. 유해진 씨가 김판수 역을 생동감 넘치게 연기해 이야기가 딱딱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집니다.”
영화에는 대사 있는 인물만 80명이 등장한다. 김판수와 감옥에서 함께 생활한 전국 각처의 전과자가 자기 고장 말을 알려주기 위해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다. 역사의 주인공은 민초들이란 주제를 함축한다. “벤또건 도시락이건,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10년간 말을 모아서 뭐 한담. 그 시간에 돈을 모아야지”라던 김판수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된다.
“줄임말과 게임말, 신조어가 넘쳐나는 지금 시기에 이 영화는 우리말을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겁니다. 온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고 책 한 권쯤 선물하고 싶어지는 따뜻한 영화입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한 엄 감독은 2006년 ‘국경의 남쪽’ 연출부로 충무로에 나온 지 12년 만에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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