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도전적 R&D로 BB크림 등 숱한 히트작 만들어
세계 1위 화장품 ODM社 키워낸 성공 스토리
대웅제약 사장직 고사하고 43세에 창업
품질 혁신·리베이트 거부로 'K뷰티' 새바람
"기업가 정신 핵심은 더 나은 내일 꿈꾸는 것"
[ 전예진 기자 ] “이런 걸 얼굴에 바르라고 만들라니….”
1991년 9월 영양크림 생산 라인을 둘러보던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대웅제약 부사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화장품 제조 공장을 차린 지 2년도 안 된 마흔넷 ‘초짜 사장’ 시절이었다. 국내 유명 화장품 회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스킨, 로션, 영양크림을 제조했다. 화장품 회사들이 의뢰한 대로 만들어주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었다. 주문서를 보니 형편없었다. 이대로 만들었다간 피부에 흡수되긴커녕 물과 기름 성분이 분리돼 못 쓰게 될 판이었다. 아무리 제조 공정에 신경을 써도 불량률이 높아져만 갔다. 재무사정도 갈수록 나빠졌다.
여러 차례 폐업 위기에 몰렸던 한국콜마는 세계 1위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로 성장했다. 한국, 중국, 미국 공장에서 연간 약 13억 개의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다. 기초, 색조화장품뿐만 아니라 선크림, 마스크팩, 보디로션 등 모든 제품을 만든다. 세계 화장품 시장에서 한국콜마를 빼놓고선 제품 개발과 생산을 얘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윤 회장은 역설적으로 국내 화장품산업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그가 한국콜마를 설립한 1990년 국내 화장품은 선진국과 달리 제조, 유통이 나뉘어 있지 않았다. 한국화장품 등 대다수 화장품 회사들은 제품 개발에서 브랜드 기획, 제조, 유통을 모두 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품질 관련 말썽이 일었다. 그 틈을 타 기름과 향료, 밀가루를 섞어 만든 가짜 화장품들이 시중에 나돌았다.
윤 회장이 생각해낸 해법은 ODM이었다. 브랜드와 마케팅만 빼고 제품 기획, 개발부터 완제품 생산, 품질 관리까지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국내에선 전무후무한 도전이었다. 기존 고객사인 화장품 회사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하청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OEM만 해서도 먹고살 수 있는데 괜한 모험을 한다는 우려였다. 윤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기술력만 확보하면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시간과 돈이 들더라도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우리만의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93년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ODM 방식을 도입한 윤 회장은 신제품 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기존에 없던 혁신 제품도 개발했다. 가루로 된 분말을 고체 형태로 압축해 휴대가 편리하도록 만든 ‘투웨이케이크’가 대표적이다. 건식, 습식 두 가지 타입으로 개발된 투웨이케이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기업들의 의뢰도 줄을 이었다. OEM 업체에 머물러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윤 회장은 위기 때마다 R&D라는 해법으로 풀었다. BB크림, 고체형 유아 파우더, 스틱형 자외선 차단제 등 신제품들이 대박을 터뜨렸다. 한국콜마의 기술력은 오늘날 한국 화장품이 ‘K뷰티’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데도 일조했다는 평가다.
윤 회장은 창업 이후 숱한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창의적이면서도 과감한 발상으로 돌파구를 만들었다. 회사를 설립할 때도 그랬다. 윤 회장은 1990년 5월 창업을 결심하고 화장품업을 선택했다. 몸담았던 제약회사와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으면서도 제품 생산, 품질관리 방식이 비슷한 업종이었다. 자본금은 1000만원이 전부였다.
일본의 화장품 수탁생산업체인 일본콜마를 찾아가 투자를 부탁했다. 마침 일본콜마는 한국 진출을 위한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법인의 지분 51%를 보유하겠다는 조건을 수용하는 곳이 없어 10년간 합작사를 찾지 못했다. 윤 회장은 오히려 일본콜마에 지분 80%를 가져가라고 제안했다. 처음부터 윤 회장이 통 크게 양보하자 일본콜마도 신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 오너십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없기도 했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봐야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렇게 충남 연기군 5평짜리 공장에서 네 명의 직원과 회사를 차렸다. 일본콜마의 출자에도 운영자금은 항상 부족했다. 완제품을 만들어 납품해야 돈을 받는 구조여서 초기 비용이 많이 들었다. 돈 문제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고 했다. “한 달짜리 당좌 대출과 상환을 3년간 반복했어요. 그것도 모자라 지인들에게 수시로 돈을 빌렸죠. 제약회사 재직 시절부터 알던 도매상들이 도와준 덕분에 버텼습니다.”
그래도 자금난은 계속됐다. 전기료를 납부하지 못해 단전예정 통보를 받기도 했다. 거래처는 세금계산서를 끊지 않는 ‘무자료 거래’를 조건으로 일감을 주겠다고 했다. 부가가치세를 탈세하기 위한 것이었다. 탈세한 돈을 리베이트로 주겠다는 제안도 들어왔다. 당시엔 업계에 무자료 거래가 빈번했다. 직원들은 “입에 풀칠도 못하는 상황이어서 일단 회사를 살리고 시간을 벌자”고 윤 회장을 설득했다.
이때 윤 회장은 돈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생계의 관점에서 보면 거래처와 계약하는 게 선(善)이고, 정도의 관점에서 보면 거절하는 게 선입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계약을 해야 하지만 내일의 관점에서 보면 거절하는 게 맞습니다.”
이어 돈을 버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고액 연봉의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창업한 이유는 ‘내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번의 불법 거래로 위기를 넘길 순 있겠지만 또 이런 상황이 온다면 한 번이 열 번, 백 번이 됩니다. 망하는 것보다 불법으로 영업하는 회사가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윤 회장은 거래처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계약금을 먼저 달라는 것이었다. “양복 한 벌을 맞출 때도 선금을 주고받는데 완제품을 공급하는데 선금을 못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거래처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의 자금 사정과 원료 및 부자재를 선구매하는 비용을 설명하며 설득했다. 계약금을 준 거래처에는 더 좋은 제품을 납품하겠다고 약속했다. 윤 회장을 믿고 선뜻 계약금을 주는 회사들이 하나둘 늘면서 막혔던 돈줄이 풀리기 시작했다. 자금난이 해소되자 생산 품질도 높아졌다.
윤 회장에게 기업가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것이라고 했다. “돈을 벌고 싶다고 돈이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더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더 효율적인 유통 단계를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익이 불어납니다. 이걸 깨닫는 데 제법 오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약력
△1947년 경남 창녕 출생
△1970년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1990년 대웅제약 부사장
△1990년 한국콜마 설립
△2014년 보건의 날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2014년 다산경영상 수상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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