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개인재산 취급한 고종…화폐 마구 찍어내 인플레 불 질러

입력 2019-01-04 17:33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4) 황혼의 대한제국

당오전·백동화 발행 남발
통화량 팽창에 물가 8배 뛰기도…수입의 대부분 사치·제사로 탕진
용산 전환국서 화폐 주조하면 지게꾼 동원해 궁궐 창고로 날라

황제가 신하들 끝없이 경계
자신의 권력 지키려 러시아에 접근…일본에 협조한 총리 김홍집 살해
정부 세수·국공유지 황실 소유로…감사·수령 관직은 값 붙여 팔아




家産國家로의 변질

국가체제의 위기에 대응해 조선 국왕은 국가의 가산화(家産化)를 추구했다. 국왕 고종의 이 같은 대응 방식은 개항기 각 위계가 분산하는 정치의 모범을 이뤘다. 1882년 당오전(當五錢)의 발행이 그 출발이었다. 액면가치는 5배지만 실질가치는 2배에 불과한 악화(惡貨)였다. 당오전 발행은 집권세력의 중심인 민(閔) 왕후와 그의 친족이 주도했다. 여러 곳에서 주조된 당오전의 상당 부분은 왕실 창고로 옮겨져 궁궐 살림살이의 경로로 유통됐다. 종래 동전의 주조와 유통은 빈민 구제와 같은 공적 용도로 엄격하게 관리됐다. 그러던 성리학적 공공국가가 당오전 발행을 계기로 왕실의 가산국가로 변질했다. 조선왕조의 관료제는 그토록 취약했던가. 연구자들은 아직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1882년까지 전국의 동전 유통액은 2000만냥이었다. 그에 비해 1894년까지 발행된 당오전은 5000만냥이나 됐다. 통화량 팽창으로 물가가 8배나 급등했다. 전국 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국왕 부처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같은 기간 왕실재정의 실질 규모는 3배나 커졌다. 민 왕후는 늘어난 수입의 대부분을 다례, 고사, 사찬(賜饌)에 탕진했다. 그는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궁중에 신당(神堂)을 짓고 무당을 불러들여 굿판을 벌였다. 1893년 한 해에만 29회의 다례와 고사가 행해졌다. 궁녀를 파견해 전국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는 야사는 사실 그대로였다.


새로운 종주국을 찾아서

고종은 그의 나라를 부강한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신료와 협력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그들이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탐한다며 경계했다. 그런 의심에서 그는 누구도 신임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을 맡기고선 책임을 전가하는 뒤통수치기 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고종이 그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추구한 책략은 그를 보호할 새로운 종주국을 찾는 것이었다.

1884년 러시아와 수교한 뒤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것과 양국이 5만 명의 연합군을 결성할 것을 요청했다. 종주국 청의 점증하는 간섭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독일이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를 사주해 벌인 공작이었다. 그러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청은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했다.

1886년 고종은 다시 러시아에 접근해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가 가장 신임하는 민영익이 그 사실을 청에 밀고했다. 그러고선 홍콩으로 도망쳤다. 고종은 청에 의해 폐위될 위기에까지 몰렸다. 제후와 대부가 다른 방향으로 분산하는 조선 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전쟁으로 종주국 청이 일본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자 러시아가 간섭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청에서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역시 러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였다.

국왕 부처는 다시 러시아에 접근했다. 러시아가 미소로 응답하자 한성에 거주하던 일본 낭인 20여 명이 미명에 궁중을 습격해 민 왕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을미사변). 러시아와 일본의 예선전과 다를 바 없는 사건이었다. 몇 달 뒤 고종은 궁중을 탈출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

그러고선 근위대를 보내 일본의 지원으로 집권한 내각 중신들을 난자했다. 총리 김홍집의 벌거벗겨진 시신은 청계천변에 사흘이나 방치됐다. 다시 한 번 처절하게 분산하는 조선 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황제로 등극하다

1896년 5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이 모스크바에서 거행됐다. 고종은 축하사절을 파견해 보호를 요청하는 친서를 전했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제도와 문자를 짐의 나라가 가르쳤다. 이로 인해 일본은 짐의 나라를 주인의 나라로 섬겼다. 그 일본이 서양 제도를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고 짐의 나라에 불법 행위를 하고 있다.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니 일본을 꾸짖어 우리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친서의 요지다. 이에 답해 니콜라이 2세는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했다. 고종은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선 1897년 10월 황제로 등극했다. 새로운 국호는 대한국(大韓國)이었다. 고대의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한 큰 왕국이란 뜻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칭제(稱帝)가 바닷속 야만국 일본과 개혁파 정치세력으로부터 자신의 보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의 일본 인식은 종족주의적 적대 감정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 걸린 열강의 이해관계가 어떤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나라가 독립국으로 존대받기 위해서 그와 신민이 무슨 개혁을 함께 이뤄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만세불변의 전제정치

1898년 10월,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정부 최고위 관료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는 각부 대신과 중추원(中樞院)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했다. 황제는 이를 재가했다. 대한제국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그렇지만 나흘 뒤 황제는 독립협회 간부를 구속하고 협회를 해산했다. 체포를 면한 윤치호 회장은 일기에다 “이 사람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어떤 배신자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탄식했다. 나라의 주권을 안전하게 분산 배치해 두자는 신민의 요구를 물리친 황제는 1903년까지 마지막 태평세월을 누렸다. 동기간 ‘자유’라는 단어는 공사의 언론에서 자취를 감췄다.

1899년 8월, 황제는 그의 나라가 어떤 정치체제인지를 규정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했다. 동 국제는 대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한다고 선언했다. 외국과의 조약 체결도 황제의 무한한 권리에 속했다. 동 국제는 6년 뒤 일본이 그 황제로부터 외교 권리를 박탈하는 조약을 강요할 때 누구도 그에 간섭하거나 비준할 여지를 차단했다. 대한제국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황실 재정의 민낯

국제 반포에 이어 정부가 이에 상응하는 형태로 개편됐다. 황제 직속 원수부가 설치돼 중앙과 지방 군대를 지휘했다. 정부 중요 기구로서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 등이 황제 개인의 기구로 옮겨졌다. 인삼 전매권, 광세, 염세, 어세 등의 정부 재원이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內藏院)으로 편입됐다. 농상공부가 관리한 전국의 역토, 둔토, 목장토 등의 공유지가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 바뀌었다. 전환국이 발행한 백동화(白銅貨)는 황실 재정의 가장 큰 수입원을 이뤘다. 1901~1904년에 걸쳐 해마다 300만원(元) 이상의 백동화가 남발돼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1원=옛 10냥). 용산의 전환국에서 주조된 백동화는 매번 20여 명의 지게꾼이 경운궁 내 별고(別庫), 곧 황제의 창고로 옮겼다. 1899년 황제는 자신이 최대주주인 천일은행(天一銀行)을 설립했다. 현재 우리은행의 최초 전신이다. 전환국의 백동화가 무슨 이유로 이 은행 금고로 옮겨지지 않았는지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적지 않은 이자 수입이 따르는데도 말이다. 순검의 호위를 받으며 지게꾼들이 동전을 지고 가는 행렬을 상상해 보라. 그것만큼 대한제국의 정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별고의 다른 큰 수입원은 매관매직이었다. 황제는 감사와 수령의 외직을 값을 붙여 팔았다. 고종의 매관매직은 1880년대부터였으며, 황제의 전제권이 확립된 1899년 이후 전성기를 이뤘다. 백동화 주조와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황제의 수입이 얼마였는지는 추정하기 어렵다. 별고에 쌓인 황제의 현금자산은 황실의 사치, 빈번한 제사와 진찬, 전각 신축, 환관과 나인 등 수많은 궁속의 월료(月料)로 허비됐다. 인삼 전매 자금과 쌀장사의 밑천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심복 이용익이 그 대리인이었다. 고종 황제가 개명군주로서 전제권력을 활용해 부국강병을 추구했다는 학계 일각의 평가는 그 시대가 남긴 방대한 재정 기록에서 단 한 조각의 근거도 찾기 힘든 황당설에 불과하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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