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놀가지'

입력 2019-01-04 18:07  

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남조선 괴뢰들의 책동이 도를 넘었다. 모든 조직을 동원해 그를 찾아내라.” 1997년 2월 북한 주체사상 창시자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베이징에서 한국에 망명을 신청했을 때, 격노한 김정일이 해외 공관에 내린 지령이다. 한국 정보기관의 납치설을 주장하던 그는 여의치 않자 며칠 만에 다른 전통문을 보냈다.

“황장엽이 혁명을 배신하고 적들 편으로 넘어갔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대외 활동의 중심을 ‘비겁한 자야, 갈 테면 가라’에 두라.” 그는 대대적인 숙청과 함께 주체사상연구소를 없애버렸다. 이어 “대외 사업은 미국, 남조선 괴뢰와의 치열한 투쟁인데 앞으론 황장엽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대적(對敵) 투쟁 경험이 있는 외무성이 맡으라”고 지시했다.

새해 벽두에 조성길 주(駐)이탈리아 북한 대사대리의 잠적 소식을 들은 김정은도 노발대발했다. 망명으로 이어질 경우 그의 집권 후 최초의 ‘대사급 탈북’이어서 충격파가 더 컸다. 자칫 고위급의 도미노 탈북으로 번질 때는 체제 안정 노력도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당 국제부와 외무성 등에 대대적인 조사와 함께 ‘놀가지’를 색출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놀가지’란 노루를 뜻하는 북한말로 ‘체제를 이탈해 해외나 남한으로 망명하는 인사’를 일컫는다.

노루는 뒷다리가 앞다리보다 길어 오르막을 잘 뛰어 오르는 특성을 지녔다. 그만큼 탈출에 능하다는 뜻에서 탈북자를 모두 아우르는 용어로 쓰인다. 북한을 탈출한 ‘놀가지’ 중에서 체급이 가장 높은 것은 황장엽 전 비서다. 그 다음은 장승길 전 주이집트 북한 대사다. 그는 형인 장승호 주프랑스 경제참사관 가족까지 동반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2016년 한국으로 온 태영호 주영국 공사도 국장급으로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에 속한다. 그 전까지는 고영환 주콩고 대사관 1등서기관, 현성일 주잠비아 대사관 3등서기관 등 중·하위급이 주를 이뤘다. 공군 조종사와 육군 장교·사병이 전투장비와 함께 귀순하기도 했다. 민간인 탈북자를 포함해 그동안 북한을 탈출한 ‘놀가지’는 3만 명이 넘는다.

조 대리대사는 부친과 장인이 대사를 지낸 고위층 자제로 알려져 있다. 외교 소식통들은 최근의 남북관계와 미·북관계를 감안할 때 그가 제3국행을 택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엄동설한에 동토(凍土) 탈출을 결행한 고위급 ‘놀가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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