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박성동·신재민의 '적자국채 대첩'

입력 2019-01-08 18:18  

백광엽 논설위원


[ 백광엽 기자 ] “부총리가 이 보고서를 보다가 집어던질 수 있으니, 클립을 튼튼하게 꽂아.”

2017년 11월 중순, 박성동 기획재정부 국고국장이 김동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집무실로 들어가면서 신재민 사무관에게 했다는 말이다. 김 부총리가 이른바 ‘적자국채’를 발행한도까지 최대한 찍으라고 강력 주문한 데 대해 항명하는 듯한 보고여서 걱정이 컸던 것이다. 나라 곳간 관리를 총괄하는 박 국장은 “이자만 연 1000억원 넘게 물게 하는 잘못된 지시니, 세 번 네 번이라도 보고해서 막아야 한다”며 신 사무관을 다독였다. 두 사람의 결기에 김 부총리가 설득당했다. 그러자 청와대 비서들 압박이 이어졌다. 김 부총리가 행사장에서 마주친 대통령에게 ‘틈새 보고’를 하고서야 ‘적자국채 전투’는 기재부 승리로 끝났다.

부당지시 막은 기재부 국고라인

신 전 사무관이 써내려 간 비망록은 한 편의 시나리오를 보는 듯하다. 박성동 신재민 공동주연에, 이상규 국채과장 등 매력적인 조연들로 가득하다. 차관, 차관보, 실장 등도 세금과 금융시장을 ‘초강력 외풍’으로부터 지켜내는데 힘을 보탰다. 기재부와 청와대 해명은 두루뭉술 핵심을 피해 가고 있다. 기재부는 “바이백이 실행됐어도 국가부채 비율에 영향이 없었다”며 뭘 모르는 신참 사무관의 ‘오버’로 몰아갔다. 바이백 취소액만큼 적자국채 발행 여력이 커지는 점을 외면한 억지다.

“정책 조율이었을 뿐”이라는 반박은 더 궁색하다. 국가재정법은 세수가 모자라는 ‘부득이한 경우’에 적자국채를 발행토록 정하고 있다. 국회는 예산심의 때 매년 국채와 적자국채 발행한도를 각각 설정한다. 그해 11월은 계획보다 세금이 23조원가량 더 걷힐 것이 분명해진 시점이라 적자국채가 불필요했다. 이 경우 적자국채 발행 중단은 당연하고도 오래된 정부의 대응 방식이다. 한 달 전 국회 청문회에서 홍남기 부총리 후보자가 “세수 호조에 따라 올해 28조8000억원의 적자국채 한도 중 남은 13조8000억원의 발행이 중단될 것”이라고 답변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더구나 초과 세수가 확실시되면, 그 자금으로 적자국채 기(旣)발행액까지 국채 상환을 허용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2009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세수가 넘칠 때는 나랏빚 상환을 고려하라는 게 입법 취지다. 김 전 부총리가 “국가채무비율을 39.4% 이상으로 올리라”고 지시한 것은 나라 회계에 대한 ‘역(逆)분식’ 시도로 볼 소지가 충분하다.

관료들의 '국익 우선 DNA' 확인

김 전 부총리는 정권 말 재정 수요에 대비해 자금의 최대한 비축을 지시했지만, 이 역시 불가능한 방식이다. 국가회계는 ‘단년도주의’여서 남은 예산을 차후 연도로 넘겨 쓰는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쓰고 남은 예산을 세계잉여금에 넣어 다음해 추경 편성 시 재원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이자를 물어가며 적자국채를 찍어 ‘세계잉여금’을 미리 부풀려놓고, 이 돈을 들이밀며 추경을 요청하는 건 정도를 한참 벗어난 불법적 행태다.

“적자국채가 발행 안 됐으니 넘어가자”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미수에 그쳤지만 그릇된 강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각 부처의 자금 요청에 맞춰 ‘시재금’ 과부족을 총괄 조율하는 신 전 사무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격이다.

권력의 장막 뒤에서 벌어진 일을 복기해보면 아찔함이 앞선다. 하지만 한국 관료 집단의 영혼과 면면한 ‘국익 우선 DNA’를 확인한 점은 큰 소득이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게 상식이다. 그게 당연한 사람의 도리다.” 못 본 척 지나쳤더라면 전도양양했을 한 청년이 자리까지 박차고 나오며 외친 말이다. 깊은 울림, 안도감과 함께 시대적 책무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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