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병합의 길
한반도 놓고 러·일 각축
"조선 39도 경계로 완충지대 설정"…러·日, 한차례씩 제안했지만 결렬
중립의 개념조차 모르던 고종, 중립국화 제의…국제사회 비웃음
美, 무반응…日 "실력 기르라" 충고
1905년 외교권 빼앗긴 을사조약
초대 통감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조선 자치능력 높이는 게 日에 득"
화폐·금융·사법제도 등 개혁 시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병합파 득세…1910년 조선 통치권 日에 넘겨줘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특사는 러시아 외상에게 조선의 39도선을 경계로 양국의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지대를 설정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장차 필요에 따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하자는 협정을 성립시켰다(야마가타·로마노프협정). 이 불안정한 약속은 러시아가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를 러시아 해군의 저탄(貯炭) 기지로 조차하려고 하는 등 조선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의 외교는 일관성이 없었다. 황제의 변덕이 지배하는 전제국가이기 때문이었다. 1897년 12월 러시아는 돌연 요동반도의 뤼순(旅順)항을 점령했다. 그에 맞서 영국, 미국, 일본이 연대할 조짐을 보이자 러시아는 조선에서 철수해 만주에 집중하는 방침으로 돌아섰다. 1898년 4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선에 관한 협정이 성립했다(니시·로젠협정).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의 세력권에 있음을 승인했으며, 일본은 러시아의 요동반도 경영을 묵인했다. 이후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이 조선에서 철수했다(이하 조선을 한국으로 부름).
허망한 중립론
러시아의 보호에 안도하던 고종은 1899년 한국의 중립화를 미국과 일본에 제안했다. 미국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나라가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쟁을 하는 다른 나라가 자국의 영토에서 군수를 조달하거나 군병을 모집하거나 군기를 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 능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고종은 만국공법의 세계에서 중립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일본 외상은 찾아온 한국 특사에게 나라의 실력부터 기르라고 충고했다. 그 사이 일본은 임박한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함대를 건설했다.
1900년 베이징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출병한 러시아는 동청철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만주 일원을 점령했다. 그에 대응해 1902년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는 남만주 봉천과 길림 일대의 점령을 강화했다. 나아가 1903년 4월 한국으로부터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조차한 다음 1개 여단을 주둔시켰다.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교섭을 벌였다. 러시아는 한국의 39도선 이북을 양국의 중립지대로 설정하자고 제안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거절했다.
전쟁이 임박하자 고종은 다시 중립을 선언했다. 그에 대해 일본 언론은 한국은 전쟁과 무관한 제3자가 아니라 전쟁의 목적물 자체며, 이에 러시아에 협력하든지 일본에 협력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요구했다. 국제사회는 중립의 능력이 없는 나라가 선포한 중립을 일종의 골계(滑稽)로 받아들였다. 그 무렵 미국의 한국 방침이 정해졌다.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은 황제와 조정의 반목으로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차라리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좋으며, 그편이 악정(惡政)에 시달리는 한국 인민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러일전쟁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했다. 고종은 전세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그해 11월까지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의 말에 안심하고 있었다. 주한 영국 총영사는 그 무렵 고종에 대해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의 비밀회담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해 어떤 야심도 없음을 표명하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서 지도적 지위를 지님을 인정하는 각서를 교환했다(가쓰라·태프트각서). 동년 8월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연장하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했다(제2차 영·일동맹). 동년 10월 미국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 강화조약이 성립했다(포츠머스강화조약). 거기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정치, 경제, 군사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지며 한국을 지도, 감리, 보호할 권리를 지님을 인정했다.
보호국으로 떨어지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1905년 11월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을 알현하면서 그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황제는 내용이야 어떻든 외교권의 형식만은 보존해주길 애처롭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황제는 일본이 제시한 조약안을 타결하도록 그의 대신에게 명했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어떤 경우에도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증하며, 통감의 권한은 외교에 한하며, 한국이 부강의 실력을 회복하면 외교권을 반환한다는 취지의 조항이 추가됐다. 이로써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양국 간 조약이 성립했다(제2차 한일협약, 세칭 을사조약).
1906년 2월 한국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내정을 감독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가 자청해 부임했다. 한국에 주둔한 각국 외교부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영사관만 남기고 철수했다.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은 일본이 처음부터 1910년의 병합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계 여론은 한국을 부속 영토로 병합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부터 종속국, 자치식민지, 위임통치로 지배해야 한다는 점진적 주장까지 여러 가지 구상으로 얽혀 있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병합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태세였다. 이토는 1000년 이상 독자의 국가를 영위해온 이민족이 일본에 동화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 실질적인 병합과 다를 바 없는 종속국으로 포섭된 가운데 국가 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해 자치 능력을 높이는 길이야말로 일본의 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취지에서 이토는 통감으로 재임한 3년간 화폐·금융·재정 개혁을 행하고,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등 이른바 자치육성정책을 펼쳤다.
그의 정책은 적절한 협력자를 구하지 못하는 가운데 좌절됐다. 한국 정부는 이토의 정책에 협력하는 것이 형식적이나마 주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 일파와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으로의 편입을 주장하는 일파로 분열했다. 1907년 7월의 헤이그밀사 사건은 한국을 명목이나마 유지해두려는 이토 통감을 비롯한 온건파의 입장을 약화시켰다. 동 사건은 고종 황제의 퇴위와 각부 차관의 일본인 임용을 규정한 제3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수습됐다. 이번에는 조정의 대신들이 황제를 배반했다. 그들은 일본의 압박에 침묵하거나 고종을 군신 간 의리를 저버린 군왕이라고 규탄하면서 퇴위를 요구했다.
병합
더 이상의 실험과 주저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급박하게 돌아간 만주의 정세였다. 일본의 만주 이권을 승인해온 미국이 만주 문제에 개입할 태세를 보였다. 미국은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일본, 러시아, 영국에 제안했다. 미국의 진출을 원치 않는 러시아와 일본은 서둘러 만주의 이권을 분할하는 협상에 들어갔다(제2차 러·일협약). 그 과정에서 1910년 4월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다. 동년 5월에는 영국이 이를 추인했다. 오늘날 한국인 일반의 통념과 달리 조선왕조의 패망은 철저하게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간의 국제적 동조로 이뤄졌다.
1910년 7월 새로 부임한 통감은 한국을 병합하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 황제의 신하들은 국호를 보존하고 황실이 왕호를 사용함을 병합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일본이 이를 수락해 국호는 ‘조선’으로, 왕호는 ‘이왕(李王)’으로 정해졌다. 1910년 8월 순종 황제는 그의 한국 통치를 일본 황제에게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양여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뒤이어 양국 간 병합조약이 맺어졌다. 그 과정 및 내용은 황제가 그의 가산을 재량으로 처분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일본 황제는 한국 황제와 그의 일족을 일본 황족(皇族)에 준하는 왕공족(王公族)으로 대우하고, 매년 옛 황실재정에 준하는 규모의 세비를 지급했다. 1926년 순종, 즉 제1대 이왕이 사망하자 일본에 체류하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제2대 이왕에 즉위했다. 열성조에 올리는 종묘사직의 제사도 1945년 8월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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