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벨리즈의 느림에 빠지다…그 남자, 벨리즈의 바다를 즐기다

입력 2019-01-20 15:50  

여행의 향기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 (4) 중남미 숨겨진 보석 벨리즈

먹고 자고 수영하고 별 보고…키 코커 섬에서 'Go Slow'




“천국 그 자체였어.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북이, 상어, 가오리와 함께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파라다이스!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을 거야.” 멕시코에서 만난 한 여행자, 3년째 세계여행 중이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가게 된 벨리즈의 키 코커(Caye Caulker). 계획에도 없던 곳일뿐더러 사실 벨리즈란 나라 자체가 있는 줄도 몰랐다. 벨리즈. 북쪽으로는 멕시코, 서쪽으로는 과테말라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온두라스만, 동쪽으로는 카리브해와 접해 있다. 국토 면적 2만2966㎢(남한의 4분의 1 정도)에 인구 30만 명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나라는 중남미 국가 대부분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데 반해 영국의 식민 아래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영어를 쓴다. 알려지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벨리즈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자, 키 코커 섬에서 뒹굴뒹굴

게으른 도마뱀처럼 느리게 섬으로 스며들다

최종 목적지는 벨리즈 시티에서 쾌속 보트를 타고 45분을 더 들어간 곳에 있는 키 코커. 기다란 타원형으로 생긴 이 섬은 걸었을 때 짧은 지름이 15분 남짓, 긴 지름은 2시간 정도면 끝에서 끝까지 닿을 수 있는 작은 곳이다.

이 자연 그대로의 섬 위에는 뚝딱뚝딱 손으로 만든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나무로 된 팻말이라도 하나 세워져 있으면 가게, 그렇지 않으면 가정집! 사실 거리의 집들은 너무도 촌스럽고 조잡한 색들의 조합이 틀림없는데 희한하게도 여기처럼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 넘치는 거리를 본 기억이 없다. 도화지의 배경색이 카리브해의 새파란색이라서일까? 목이 마르면 그림처럼 서 있는 길거리 야자수 열매 하나를 따 먹으면 그만이다.

벨리즈, 키 코커 섬에서의 하루 일과는 아침을 먹고 가깝거나 먼 바다로 나가 수영을 하거나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 마리 인어가 돼 각종 물고기와 거북이, 때론 순한 상어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며 아름다운 산호초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어느새 배가 고파진다. 어슬렁어슬렁 바다에서 걸어나오며 바라보던 섬을 난 여전히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던, 내가 사랑하는 풍경이니까.

키 코커에서 한 달가량을 지내면서 난 느림의 미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고 슬로(Go Slow)라는 표어를 쓰는 이 섬에서의 생활은 아침 먹고 수영하기, 점심 먹고 뒹굴거리며 낮잠 자기, 저녁 먹고 별 보기가 전부였다. 일상에서도, 여행 중에도 매일 더 많은 것을 보고 얻기 위해 바쁘게 살아온 내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느린 생활이 익숙했던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 바쁜 거 하나 없어 뛰어다닐 일 없고, 문제가 생겨도 화내는 일 한번 없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먼바다에 나가 다이빙 수업을 하기로 약속하고 돈까지 이미 지불했는데, 배가 고장나 못 가게 됐다며 내일이나 모레 가잔다. 허허 웃는 섬 사람들에게 나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나도 점점 그들의 삶에 동화됐고, 모든 게 평화로운 이 섬에선 뛸 일도 화낼 일도 없어졌기에 거울 속 내 표정은 한층 온화해져 있었다. 그들 말이 맞았다.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뭐.

해가 지면 우리는 섬의 북쪽 끝으로 걸어가곤 했다. 그 끝에는 ‘게으른 도마뱀’이라는 바가 하나 있었는데, 볼 때마다 ‘이름 한번 잘 지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 앞엔 낮이건 밤이건 한껏 늘어진 사람들이 모래사장 위를 뒹굴거리고 있었다. 흑인, 백인, 황인종 할 것 없이, 아니 여기선 인종의 개념이 없다. 그냥 얼굴 좀 까만 친구, 얼굴 좀 하얀 친구일 뿐이다. 인종과 종교가 다양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한데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키 코커에서 직접 살아본 결과 그들은 어울리는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함께’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끊임없는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는 지구상에서 가능한 일일까, 천국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평화로운 섬이 또 어디 있을까?

살면서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가슴 속 도피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입버릇처럼 T군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언젠가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져 내가 훌쩍 사라지면 키 코커로 찾으러 와.”

그날엔 아마도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게으른 도마뱀 바 앞에 앉아 한껏 뒹굴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남자, 카리브해 요트 위에서 뒹굴뒹굴

카리브해 무인도에서 즐기는 이색체험

끝없이 이어진 푸른 수평선, 손 내밀면 닿을 듯한 하얀 뭉게구름, 어깨가 절로 들썩여지는 신나는 레게 음악.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한 손으로 눈을 덮자 손가락 사이로 하얀 물살이 보인다. 우리가 탄 요트를 따라오는 돌고래 무리들이 푸른 파도를 가르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에메랄드빛 카리브해 위에 우뚝 서 있다. 불어오는 바람을 가르며 말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냐고? 아니, 이것은 15명의 친구들과 함께한 나의 리얼 요트 투어 이야기.

천국처럼 평화로운 키 코커라는 작은 섬을 배회하던 중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2박3일의 요트 투어 여행자를 모집합니다. 이번 연말, 카리브해의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특별한 새해 인사를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들어온 키 코커. 그 섬에서 떠나는 또 다른 여행. 그래 어쩌면 이 요트 여행이야말로 카리브해를 만끽할 수 있는 진정한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카리브해를 누볐을 해적들처럼 내 가슴은 설렘을 안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일링을 떠나는 날 아침.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15명의 여행자와 몇몇 선원들은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우리들의 서먹서먹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라저 킹 호’(요트 이름)를 타기 직전 벗어던진 신발과 함께 한방에 사라졌다(요트 투어를 하는 동안 신발은 필요 없기 때문에 출발 전 신발을 모두 벗어 한곳에 모아놓는다). 신발과 함께 일상의 모습도 벗어던진 걸까? 모두 소풍날 아침의 아이들처럼 설렘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뱃머리, 갑판 위, 배꽁지 등 각자의 취향대로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 눈을 떠도, 두 눈을 감아도 코끝을 스치는 바다 내음이 한가득 불어온다. 드디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요트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라저 킹 호’는 넓고 으리으리한 크루즈가 아니다. 선원과 승객 15명이 옹기종기 모여앉거나 누우면 꽉 차는 아담한 돛단배 같은 요트일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한정된 공간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바다 보기, 낮잠 자기, 점심 먹고 스노클링, 멍때리며 낚시하기, 그리고 다시 바다 보기. 무한 반복되는 이 행동들이 지루할만큼 단조롭지만 우리는 그 한가로움을 100% 만끽하고 있었다. 나의 단잠을 깨우는 알람도 없고, 급하게 제출해야 할 서류도 없고, 원치 않는 누군가의 잔소리도 없는 이 적막한 시간들이 이처럼 달콤할 줄이야.


벨리즈의 키 코커 섬에서 시작하는 2박3일간의 요트 투어. 낮 동안 유유자적하게 바다를 항해하며 스노클링과 낚시 등을 즐긴다. 또한 무인도에서 밤을 보내는 이색 체험도 경험할 수 있다. 벨리즈는 중미에서 유일하게 북태평양이 아니라 카리브해에 접해 있는데, 그중에서도 요트가 항해하는 키 코커의 앞바다는 배리어 리프(육지에서 멀지 않은 바닷속에 길게 이어져 있는 산호초) 지역에 속하고 있어 늘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국 만리에서 푸짐하게 펼쳐진 랍스터 파티

어느새 요트 투어의 첫날밤을 보낼 무인도에 다다랐다. 100m 달리기를 하면 끝나버릴 것 같은 크기의 섬. 야자수 한 그루만이 유일한 주민인 무인도는 만화책에서 꺼내온 듯한 너무나도 작고 귀여운 섬이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작은 섬, 그 섬을 지나가는 바람을 덮고 누워 달빛에 반짝이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밤하늘에 새겨진 별처럼 또 하나의 추억이 가슴 속에 새겨졌다.

둘째 날 아침이 밝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요트에 올랐다. 오늘의 내 자리는 배 꼭대기 갑판 위. 어제와 다름없이, 한결같이 잔잔한 바다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레게음악 들으며 바다 보기, 갑판 위에서 낮잠 자기, 점심 먹고 스노클링, 또 누군가는 멍하니 낚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의 세일링이었지만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오늘의 무인도는 어제 머물렀던 섬에 비하면 제법 크기가 있다. 그래봤자 섬 한 바퀴를 다 둘러보는 데 10분도 채 안 걸리지만. 저녁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캡틴 케빈이 실력 발휘를 하는 날. 낮 시간 동안 함께 잡은 참치와 아이 키만한 생선들이 우리의 만찬을 위해 테이블에 놓여 있다. 그 생선들 위로 수북이 쌓여 있는 랍스터. 그때 갑자기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 선장 캡틴이 크게 외쳤다. 작디 작은 섬의 밤하늘에 자그마한 폭죽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우리 모두는 서로를 얼싸안으며 서로의 새해를 축하해 주었다.

아름다운 여름밤이다. 새해를 맞이하기에 이보다 더 짜릿한 순간이 있을까. 남자들이여 갑판 위로 몸을 던져라. 푸르디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서 밝아오는 새해를 함께 맞이하자!

벨리즈=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그 남자(오재철), 그 여자(정민아) : 결혼과 동시에 414일간 신혼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중앙대 사진학과 출신인 그 남자와 웹 기획자 출신인 그 여자는 부부이기에 앞서 한 개인으로서 한 지역에서 경험하게 되는 두 가지 여행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공동 저서로 《함께, 다시, 유럽》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등이 있다.

여행메모

벨리즈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중미의 숨은 여행지다. 2015년부터 무비자국으로 변경됐으며, 무비자 여행이 가능한 기간은 90일 이내다. 벨리즈 국토의 최초 주인은 마야인이었다. 16세기 이후 스페인의 지배로 인해 중남미 국가 대부분이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데 반해 벨리즈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81년에 영국 연방에 속하는 독립국이 됐고, 1991년 미주기구(OAS)에 가입하고, 1993년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한다. 시차는 한국과 15시간 차이가 난다. 전형적인 열대 기후로 덥고 습하다. 5월부터 11월까지가 우기이고, 2월부터 5월까지가 건기다. 매년 7~11월에 허리케인이 발생하며, 연평균 기온은 2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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