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문 넓어도 창업…'모험' 꺼리던 日청년 달라졌다

입력 2019-01-21 17:57   수정 2019-01-22 07:52

2019 일본 리포트 - 일본을 보며 한국을 생각한다
한경 데스크·기자 현지 특별취재

도쿄·교토·쓰쿠바大 '벤처 삼총사'
학내 벤처 500여개…매년 급증

도쿄大 벤처 2년새 100개 늘어
"대기업에 안주 않고 꿈 좇겠다"



[ 정영효/임락근 기자 ]
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 아즈마산초메에 있는 벤처기업 도그(Doog). 로봇형 카트인 사우저(Thouzer)를 개발해 판매하는 회사다. 폭 60㎝, 길이 75㎝, 높이 45㎝의 네 바퀴가 달린 사우저는 사람의 움직임을 원적외선으로 감지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작업을 돕는 로봇이다. 2012년 11월 쓰쿠바대 지능로봇연구실에서 이 회사를 창업한 오시마 아키라 대표(34)는 “대기업들이 제조하는 로봇이 마음에 안 들어 좋은 로봇을 직접 개발하고 싶어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학풍으로 알려진 일본 대학가에 벤처 창업 바람이 불고 있다. 2017년 기준 도쿄대(245개) 교토대(140개) 쓰쿠바대(98개) 등 일본 내 ‘벤처 3총사’로 불리는 3개 대학의 학내 벤처는 483곳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2년 전(348개)에 비해 38.8%나 급증했다. 지금은 500개를 훌쩍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기업이나 금융회사에 입사해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는 길을 포기하고 모험적인 창업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대학생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보과학과 4학년 미우라 료타로 씨(22)도 마찬가지 경우다. 그는 머신러닝을 이용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퀀텀코어를 지난해 10월 창업했다. “그동안 해오던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창업을 선택했다”며 “사실 대기업이나 은행이 과거처럼 안정적인 직장도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일본 대학에서 창업이 가장 활발한 곳은 도쿄대다. 2004년 이후 도쿄대 교수와 학생이 세운 벤처기업이 350여 개에 달한다. 2년 전에 비해 100여 개 늘어났다. 도쿄대의 벤처기업 양성소(인큐베이터)를 이끌고 있는 가가미 시게오 교수는 “지난 몇 년간 미국 실리콘밸리 등에서 젊은 창업자들이 큰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늘면서 도쿄대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도쿄大 벤처 16곳 IPO…쓰쿠바大 창업프로젝트만 年 200개

日 청년 '종신고용' 환상 버렸다
"평생 회사원으로 보낼 순 없다…능력 키울 수 있는 창업무대로"
대학가 자발적 창업 열기 번져

쓰쿠바대 벤처기업 생존율 80%
미래 '유니콘 후보군' 넘쳐나, 대기업도 '100% 자사기술' 폐기
新기술 위해 대학과 협력 강화



일본 도쿄대는 벤처기업 50여 곳에 사무실과 실험실을 제공하는 공간이 모자라 지난해 9월 도쿄대 병원 건물을 개조해 새로운 인큐베이터 시설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시설도 일찌감치 동나 부동산 대기업 미쓰비시지쇼와 함께 20여 실 규모의 인큐베이터 시설인 ‘혼고 테크 개라지’를 추가로 마련했다.

넓어지는 창업전선

청년 인재들의 창업 열기는 도쿄 북쪽으로 50㎞ 떨어진 쓰쿠바시에서도 뜨겁다. 인구 23만 명 가운데 박사만 8000명인 쓰쿠바에는 일본 국립연구소의 절반인 29개 연구기관을 포함, 200여 개의 연구기관이 몰려 있다. 나카야마 히데유키 쓰쿠바시 과학기술진흥과장은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가 높아 동네 어디서나 로봇실증실험을 할 수 있는 도시”라고 말했다. 쓰쿠바시청 앞 도로 2㎞를 자립주행 로봇들이 달리는 ‘쓰쿠바챌린지’는 작년 11월로 8회째를 맞았다. 작년 8월 일본에서 처음 블록체인을 활용한 투표를 했던 곳에서 쓰쿠바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벤처기업이 언제든 나올 수 있는 환경답게 사업성이 검증되면 바로 벤처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벤처 프로젝트가 매년 200개씩 탄생하고 있다. 미래의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벤처기업) 후보도 가득하다. 일본 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은행 및 보험회사를 산학협력 프로그램에 끌어들인 덕분에 쓰쿠바대 벤처기업은 금융회사 소속 전문가를 자사 직원으로 파견받아 재무관리를 맡길 수 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탄생한 벤처기업 133곳 가운데 98곳이 살아남아 80% 넘는 생존율을 자랑한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벤처로 발길을 돌리는 인재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나가타 쇼 씨(24)는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일본 최고의 엘리트다. 그는 오는 4월부터 탄자니아에 진출하려는 일본 기업을 컨설팅하고 태양광 패널을 탄자니아 농촌에 렌털하는 벤처기업인 왓샤에 다니기로 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보수적인 은행이나 대기업에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지금 선택한 벤처가 개인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대기업과의 협력도 가속화

성공한 기업도 쏟아져나오고 있다. 도쿄대 벤처기업 가운데 지금까지 16개 기업이 주식시장 상장(IPO)에 성공했다. 바이오의약품 개발사인 펩티드림은 시가총액 5533억엔(약 5조7000억원)으로 대학 벤처 중 최대 규모다. 로봇 개발회사 샤프트는 2017년 구글이 인수하면서 화제가 됐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로봇슈트 개발사인 사이버다인도 쓰쿠바의 자랑이다. 시가총액이 1157억엔으로 펩티드림과 함께 창업 10년이 안 돼 시총 1조원을 돌파한 두 번째 벤처기업이다. 대학도 사명감만으로 산학협력과 벤처 육성에 공들일 필요가 없게 됐다. 작년 2월부터 대학 법인이 벤처기업의 스톡옵션을 보유할 수 있게 돼 ‘투자’가 가능해졌다.

벤처기업을 하대하던 대기업의 시선도 달라졌다. 히타치에서 쓰쿠바대 정교수로 전직한 오치다 후미히코 교수는 “양산기술을 연구하는 대기업은 먼 장래를 내다본 기초연구를 대학에 맡기지 않을 수가 없다”며 “벤처기업을 파트너로 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라고 말했다.

가와사키중공업도 ‘100% 자사기술’ 전통을 폐기했다. 이 회사의 오쿠마 도시야 정밀기계·로봇비즈니스센터 글로벌전략담당 이사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공지능(AI)은 가와사키의 기존 사업과 전혀 다른 영역”이라며 “가와사키의 로봇을 플랫폼으로 하고 여기에 여러 신기술을 결합하는 전략을 짰다”고 말했다.

도쿄·쓰쿠바=정영효/임락근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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