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대주주 탈법에 스튜어드십코드 적극 행사"
문재인 대통령 "혁신도 포용도 모두 공정경제가 뒷받침 돼야"
상법·공정거래법 등 기업 옥죄는 법안들 국회통과 촉구
재계 "기업인 불러 규제개혁 약속하고 뒤통수치는 격"
[ 장창민/유창재/류시훈/박재원 기자 ]
“기업들이 A매치 경기를 뛰고 있는데, 정부가 자살골을 넣으려고 덤비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공정경제 추진전략 회의’ 결과를 전해 들은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이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원칙) 행사를 강조하고, 기업 대주주 경영권을 약화시키는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 필요성을 재차 언급하자 나온 반응이다. 기업마다 경기침체로 인한 수익성 악화와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 등에 따른 ‘인건비 폭탄’에 짓눌려 있는 상황에서 기업 경영활동을 옥죄는 제도와 법안이 예고되자 답답한 심경을 내비친 것이다.
“기업들 뛰게 해준다더니…”
문 대통령은 이날 ‘대기업의 책임있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행사할 것”이라며 “틀린 것은 바로잡고 반드시 그 책임을 묻겠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상법과 공정거래법 등도 조속히 국회에서 통과돼야 한다”고 했다.
경제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5일 ‘기업인과의 대화’를 통해 규제개혁 등을 약속하며 기업이 제대로 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해놓고, 1주일여 만에 기업들을 옥죄는 각종 제도 적용과 법안 통과를 독려했기 때문이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대통령의 말이 결국 ‘립서비스’였는지, 기업들이 메시지를 잘못 해석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문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기업들은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서 124조원을 운용하며 297개 상장사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포스코, 네이버, LG화학 등 웬만한 주요 대기업은 모두 국민연금이 주요 주주다. 국민연금은 이런 기업들을 상대로 이사 및 감사 해임, 정관변경, 주주대표소송, 손해배상소송 등 각종 주주권을 행사할 근거를 마련했다.
기업들이 우려하는 건 국민연금이 정부와 정치권, 노동조합 등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시민단체, 노조, 사용자단체 등의 대표자들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간섭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재계 관계자는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를 공언한 것부터가 이미 정부의 개입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들을 죄인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국민연금 실무자들과 결정권자들이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쏟아지는 규제 법안
문 대통령이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을 강하게 주문한 것에 대한 재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기업 대주주의 손발을 묶는 법안들이어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뼈대로 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 국내 주요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에 곧바로 노출될 것이란 걱정이 많다. 한국경제신문이 최근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중 시가총액이 큰 30대 기업(작년 10월 말 기준)의 이사회 현황 및 지분율(2017년 말 기준)을 분석한 결과 상법 개정안에 포함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를 함께 시행하면 7곳의 이사진 절반이 투기자본의 손에 넘어갈 공산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지주회사 및 일감몰아주기 규제 강화 등을 담은 공정거래법도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주요 기업의 경영권이 크게 위축되고 주요 그룹마다 계열사 ‘지분 교통정리’에 내몰리는 등 부작용이 클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롯데 신세계 등도 문 대통령의 유통 관련 법안 언급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형 복합쇼핑몰의 의무휴업을 강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상권 침체는 물론 일자리 창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상법 개정안 등에 반대하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과의 ‘빅딜’을 통해 언제 국회 문턱을 넘을지 모른다”며 “한국당이 조국 민정수석의 국회 출석을 조건으로 갑자기 산업안전보건 개정법에 손을 들어준 게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장창민/유창재/류시훈/박재원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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