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완전한 동화 노린 日帝…시장기구·사유재산제도 이식

입력 2019-01-25 17:19   수정 2019-01-30 18:04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7) 근대의 이식

1912년 조선총독부 민사령 발포…일본의 23개 법률 조선에 적용
모든 거주자 '私權' 주체로 탈바꿈…호주제 시행, 여성도 이름 올려

토지·임야·광산 등 등기제 시행…포괄적인 사유재산제도 확립
토지조사 후 사유권 인정해 줘

은행·회사·거래소·도소매업 등 각종 시장기구 토착문화와 접목
철도·도로·항만·통신시설 들어서




동화와 차별

‘한국경제사 3000년’의 시간 여행은 지금부터 1910년대 이래의 현대사에 진입한다. 조선을 부속 영토로 병합한 일제는 조선의 완전하고 영구한 동화(同化)를 지향했다. 1919년 조선 총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과 일본 관계는 열강과 그 식민지 관계와 다르다. 혼연융화(渾然融和)해 그 결합을 굳게 하는 것은 실로 제국의 존재 요건이다. 그들에겐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적 민족성이 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동화해 버리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고로 통치의 방침은 동화주의지만 점진주의에 따를 필요가 있다.” 점진주의,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차별주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정치적 능력을 차별했다. 반면 경제 면에서는 비교적 급속한 동화를 추구했다. 이에 따라 일제하 조선 경제는 적지 않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것은 세계사 맥락에서 ‘근대’의 이식이었다.

민법의 세계

1912년 총독부는 조선의 민사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시행 중인 민법, 상법, 민사소송법 등 23개 법률을 의용(依用)한다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발포했다. 1897년 일본은 프랑스와 독일 등의 민법을 참조해 자국의 민법을 제정했다. 서유럽에서 발흥한 근대문명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사권(私權)’의 주체다. 민법은 ‘소유권 절대의 원칙’ ‘계약 자유의 원칙’ ‘손해 배상의 원칙’을 통해 개인의 ‘사권’을 보장한다. 조선민사령 발포로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은 ‘사권’ 또는 ‘사적 자치’의 주체로 탈바꿈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변화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선인의 삶과 상호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도 점차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숙했다.

호주제 가족

민법의 세계에서 개인은 천연의 혈연공동체인 가족 일원으로 존재한다. 민법의 절반은 가족과 개인 관계에 관한 규정이다. 조선에 이식된 일본 민법에서 가족은 ‘호주의 가(家)에 있는 배우자 및 친족’으로 정의됐다. 호주는 가족원의 부양을 책임짐과 동시에 그 구성과 지위의 변동을 결정할 권리를 보유했다. 가족은 호주의 권리가 그의 상속자에게 승계되는 법적 단위였다. 호에는 그의 법적 주소로서 본적(本籍)이 붙었다. 같은 집에 살더라도 본적을 공유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며, 멀리 떨어져 살아도 본적을 공유하면 가족이었다. 이런 개념의 호주제 가족은 19세기까지 조선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을 호주제 가족의 일원으로 등록하는 작업은 1909년부터였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호적을 이전 시대의 호적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특질이 두드러진다. 첫째, 모든 인간이 호적에 등록됐다. 이전 시대에는 전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하층민은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다. 둘째,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차별하는 신분에 관한 표기가 일절 사라졌다. 새로운 호적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했다. 셋째, 여성이 이름을 갖게 됐다. 이전 시대 여성은 독립의 사회적 인격이 아니어서 이름이 없었다.

사유재산제도

사권의 기초가 되는 재산권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공부(公簿)에 등록돼야 했다. 등록되지 않은 재산권은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총독부는 등기제도를 시행했다. 토지, 임야, 광산, 어장 등의 물적 재산권은 토지조사령, 삼림령, 광업령, 어업령을 발포해 소유자와 권리의 실태를 조사했다. 특허권, 의장권, 상표권, 저작권 등의 무체(無體) 재산권도 각각의 단행법을 통해 그 권리와 연한이 규정됐다. 1910년대를 통해 총독부는 포괄적 범위의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했다. 이미 건너온 일본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렇지만 조선인의 재산권도 법률의 보편주의에 따라 창출되고 보호됐다.

사유재산제도는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이룬다. 사유재산권의 성립은 거래의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거래의 대규모화, 장기화, 신용화를 촉진한다. 사유재산권 확립은 수익의 귀속을 명확히 함으로써 기술과 조직의 혁신을 위한 투자를 촉진한다. 법률에 의한 재산권의 엄밀한 정의와 다양한 속성의 구분은 자본의 결합, 유동, 축적을 촉진한다. 그런 사유재산제도가 일정(日政) 초기에 민법과 여타 단행법의 의용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이식됐다. 그 토대에서 조선 경제의 ‘근대적 성장’이 개시됐다.


토지조사사업

1912∼1918년에 걸친 ‘토지조사사업’은 총독부 일반 행정의 기초로 전, 답, 대지, 임야, 도로, 구거(溝渠·인공적인 수로 또는 그 부지), 유지(溜池), 하천, 제방, 분묘, 기타 잡종지의 소유권, 면적, 등급, 지가를 조사하는 일대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에 대소 삼각점이 설치되고 과학적 측량으로 각종 토지의 면적, 지반(地盤), 표고가 조사됐다. 그 성과로 제작된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껏 이 나라 토지 행정의 기초로 긴요하게 활용 중이다.

사업 과정에서 인구, 경지, 산천, 도로의 객관적 지표가 명확해지자 그에 준해 행정구역을 합리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병행됐다. 그 결과 종래의 317개 군이 220개 군으로, 4336개 면이 2522개 면으로, 6만3000여 동리가 2만7000여 동리로 통폐합됐다. 아울러 동리에 속한 모든 필지에 번지가 부여돼 인간과 토지의 법적 소재가 명확해졌다.

토지 소유권은 신고 방식으로 조사됐다. 그래도 큰 혼란이 없을 만큼 토지의 사적 소유가 높은 수준으로 성립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고는 정해진 기한에 99.95%의 완전도를 보였다. 토지조사반이 도착하면 소유자는 이장 및 이웃과 함께 자기 토지에 입회해 당자임을 확인받았다. 소유자가 둘 이상이면 분쟁지로 접수돼 별도 심사 과정을 거쳤다. 소유권이 1차 사정되면 그 결과를 일정 기간 공시해 불복 신청을 받았다. 분쟁지에 대한 총독부 심사와 판정은 문서주의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전, 답, 대지 등 총 487만여㏊ 가운데 12만여㏊가 국유지로 결정됐다. 국유지의 대부분은 1924년까지 조선인 소작농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됐다. 총독부는 새롭게 사정한 지가의 1.3%를 지세로 부과했는데, 당시 일본 농민이 그의 정부에 부담한 지세의 절반 정도였다.


시장기구와 사회간접자본

시장경제는 은행, 조합, 회사, 거래소, 도·소매업, 신탁업, 운송업, 창고업, 보험업, 직업소개소 등 재화와 서비스의 흐름을 중개하는 수많은 시장기구의 유기적 결합이다. 일정기에 걸쳐 각종 시장기구가 이식돼 토착 문화에 적합한 형태로 정착했다.

1907년 설립된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은 1912년 조선은행으로 재편됐다. 조선은행은 일본은행권과 그에 준하는 채권을 준비금(準備金)으로 해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과 등가였다. 이외에 민간의 대부업이 은행으로 승격해 1912년 21개 시중은행이 활동했다. 회사는 초기엔 회사령에 따라 그 설립이 자유롭지 않아 1918년에도 266개에 불과했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자 1939년까지 그 수가 5600여 개로 늘었다. 1920년에는 경성주식현물거래소가 설치돼 민간에서 자생한 수출상품거래와 주식거래를 제도화했다.

각종 시장기구의 이식과 더불어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사회간접자본이 축설됐다. 1912년까지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호남선이 개통돼 한반도를 종관(縱貫)하는 철도망이 완성됐다. 철도는 1945년까지 주요 7개 선이 추가로 개통돼 총연장이 4000㎞를 넘었다. 각 철도의 종점을 이루는 항구에는 항만 시설이 증축돼 철도운수와 기선운수의 연락을 강화했다. 도로는 1937년까지 2만7000㎞가 개설됐다. 양측에 측구(側溝)가 설치되고 가로수가 심어진 1, 2등 도로를 가리켜 조선인은 신작로(新作路)라 불렀다. 도로를 달린 각종 자동차는 1911년만 해도 2대에 불과했는데 1935년까지 7130대로 늘었다. 우편·전신을 취급한 통신기관은 1905년 512개에서 1940년 1246개로 확장됐다.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축설로 전국이 단일 시장으로 통합됐다. 1910년 16개 주요 도시 쌀값은 평균 20% 차이를 보였다. 그것이 1938년까지 3∼4%로 축소됐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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