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vs 러시아·中, 유엔 안보리서 정면 충돌
서민·빈곤층에 무상 주거·의료·밀가루 등 생필품 가격 통제
고유가로 유지되던 '차베스 모델', 마두로 정권 이후 경제붕괴 불러
경제난에 국민 80% 극빈층 전락…마두로는 권력 유지에만 몰두
야권 탄압 속 대통령 선거에 반발…과이도 국회의장, 임시 대통령 자처
[ 주용석 기자 ]
반(反)마두로 시위를 지지하는 미국이 26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친(親)마두로 지지국인 러시아·중국과 정면충돌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이 베네수엘라를 불법적인 마피아 국가로 전락시켰다”며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 바실리 네벤자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는 “쿠데타를 기획하는 게 미국의 목적”이라고 비난했다. 중국도 “이는 베네수엘라의 주권 문제로 안보리 소관이 아니다”고 마두로 정권을 감쌌다. 이번 안보리 회의는 미국이 요청해 겨우 성사됐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의회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유일한 기관으로 인정해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한다’는 안보리 성명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veto)을 가진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채택이 어려운 상황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주요 서유럽 국가들은 안보리와 별도로 대통령 선출을 위한 재선거를 마두로 정부에 요구했다. 이들 국가는 “베네수엘라가 8일 안에 대선 계획을 발표하지 않으면 과이도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15년 2월 “베네수엘라 경제가 (2년 전 사망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망령에 망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차베스 전 대통령이 1999년 2월부터 2013년 3월까지 14년간 집권하며 지속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퍼주기 복지’가 경제난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지적이었다.
지금 베네수엘라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났다. 차베스에 이어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까지 지난 20년 동안 ‘좌파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 이어지며 국가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내총생산(GDP)은 계속 뒷걸음질하는 중이고 지난해에만 물가상승률이 130만%에 달했다. 국민의 80%가량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조국을 탈출한 베네수엘라인이 전체 인구의 10%(330만 명)에 달한다.
야당 지도자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35)이 올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마두로에게 맞서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고 나서면서 베네수엘라는 ‘한 나라 두 대통령’의 대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풍부한 석유자원만을 믿고 퍼주기에 나섰다가 실패한 ‘차베스 모델’이 부른 예고된 정치 혼란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실패한 ‘사회주의 유토피아’
차베스 전 대통령은 집권 후 포퓰리즘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책을 폈다. 석유자원을 국유화한 뒤 석유 판매수익을 토대로 서민과 빈곤층에 무상 혹은 낮은 가격으로 주거, 의료, 교육 등의 복지를 제공했다. 서민 생활 안정을 명목으로 밀가루, 식용유, 세면도구 등 생활필수품 가격도 통제했다. 처음엔 빈곤층이 줄고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차베스 모델’이 효과를 발휘하는 듯했다. 2013년 차베스 사망 후 집권한 마두로 대통령도 이 정책 기조를 따랐다. 스스로 ‘차비스타(차베스 신봉자)’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두로 정권이 들어설 즈음부터 ‘차베스 모델’의 한계가 드러났다. 마두로 취임 첫해 물가상승률은 50%를 넘었다. 과도한 가격통제로 기업들이 생산을 기피한 결과였다. 2013년 세계은행의 ‘기업하기 쉬운 나라’ 조사에서 베네수엘라는 185개국 중 180위였다. 대다수 기업이 국유화되면서 효율성이 떨어졌고 부패는 누적됐다.
복지비용을 비롯한 공공지출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정부 재정도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유럽 재정위기 때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던 그리스(9% 안팎)보다 높은 11%에 달했다.
그나마 고유가가 지속됐을 땐 버틸 수 있었다. 1999년 배럴당 10달러대였던 국제 유가는 2008년 140달러대까지 뛰면서 베네수엘라 경제의 생명줄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국제 유가가 2014년 이후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경제성 낮은 유전은 문을 닫았고 남은 유전도 원유판매금이 급감했다. 외채 상환이 힘들어지면서 베네수엘라 통화가치가 폭락했고, 생필품 수입대금마저 부족해지자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경제난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2015년 총선에서 우파 야권연합이 승리해 16년 만에 의회 권력을 장악했다. 마두로 정권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2016년 환율 재평가와 함께 20년 만에 처음으로 기름값을 올려야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구조개혁은 없었다. 한번 망가진 경제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마두로 정권 1기(2013~2018년)에 베네수엘라 GDP는 35% 감소했다. 베네수엘라는 한때 중남미 최고 부자 국가로 꼽혔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 국민의 80%가 극빈층이나 빈곤층으로 분류될 정도다. 5세 이하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25명가량으로 중남미 평균(15명 안팎)보다 훨씬 높다.
물가는 ‘살인적’이다. 베네수엘라 국회에 따르면 지난해 물가는 19일마다 2배로 뛰었다. 올해 물가상승률도 1000만%에 달할 것으로 IMF는 예상했다.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20%대로 치솟았다. 상황이 통제불능으로 치닫자 마두로 정부는 각종 경제지표 발표를 중단했다.
‘시계 제로’ 베네수엘라의 미래
마두로 대통령은 경제가 파탄 났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야권을 탄압해왔다. 그는 지난해 5월 야권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은 야권 인사들이 구속되거나 가택연금 상태였다며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경제 제재를 강화했고 베네수엘라 경제난은 가중됐다.
정치적 갈등은 마두로 대통령이 이달 10일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정통성 시비가 불붙었다. 급기야 지난 23일 열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서 과이도 국회의장이 ‘대통령이 직무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30일 안에 대선을 치른다’는 헌법을 내세워 “임시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베네수엘라의 운명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는 군부가 꼽힌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마두로 지지’를 밝힌 상태다. 하지만 지난 21일 27명의 군인이 소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군부에도 변수가 생기고 있다. 미국 워싱턴DC에 파견된 대령급 인사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과이도 국회의장 지지 의사를 밝혔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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