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퇴직한 5060, 할 일 없다고 산에 가거나
SNS에 험악한 댓글 달지 말고 인도·동남아 가보라"
"박항서도 구조조정됐다가
베트남에서 인생 이모작 대박 터뜨렸다"
"졸업해도 취업 안되는 국문과 졸업생 왕창 뽑아
태국·인도네시아 한글 교사로 보내고 싶다"
"자영업자 힘들다고 하는데
식당들은 왜 국내서만 경쟁하려 하나"
참석자들 "기업인 모인 자리…완전히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김현철 "新남방 지역에서 새 기회 발견하자는 취지" 해명
[ 도병욱/박재원 기자 ]
“우리나라 50~60대들, 조기퇴직하고 할 일 없다고 산에 가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험악한 댓글만 달지 말고 아세안으로 가셔야 돼요.”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 겸 신남방정책특별위원장이 28일 기업인 2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부적절한 발언을 쏟아내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주최로 상의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 조찬강연회에서다. 김 보좌관은 정부의 신남방정책(아세안 국가 및 인도와의 교역을 확대하는 정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한국의 현실이나 정부 정책에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인도나 아세안으로 나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강연회에 참석한 기업인들은 “무시당한 기분”이라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참석자의 80%가량은 50~60대 CEO였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태국·브루나이·베트남·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 등 10개국이다.
“헬조선 아니라 해피조선”
인도와 아세안 시장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던 강연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건 자영업자 얘기가 나오면서부터다. 김 보좌관은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하는데, 세계 7대 경제대국(한국)에 있는 식당들이 왜 국내에서만 경쟁하려 하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베트남과 일본, 태국 등지의 음식점이 해외로 진출하고 있는 사례를 들면서 한국 자영업자들과 비교했다.
김 보좌관은 이어 “50대와 60대가 조기퇴직한 뒤 자꾸 산에만 가시는데, 이런 데(아세안 및 인도) 가셔야 한다”며 “한국에서 할 일 없다고 산에 가거나 SNS에 험악한 댓글 달지 말고 아세안이나 인도에 가야 한다”고 했다.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에 대해선 “(한국에서) 구조조정됐다가 베트남에서 인생 이모작 대박을 터뜨렸다”고 표현했다.
취업난 등을 호소하며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그는 “요즘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면 취직이 잘 안 되지 않냐”며 “그런 학생들을 왕창 뽑아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 한글 선생님으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한국에) 앉아서 취직이 안 된다고 ‘헬조선’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어 “아세안 국가를 보면 (한국은) ‘해피조선’이다”고 주장했다. 아세안 국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글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와중에 나온 발언이지만,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말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인물이 이 같은 발언을 한 게 더욱 문제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청년 구직자와 퇴직한 5060세대, 자영업자들의 삶을 개선할 만한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해외로 나가라”고 말한 건 ‘책임회피’라는 지적이다.
“반(反)기업 정부 아니다”
강연 주제(2019년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주요 추진 정책)와 무관하게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발언을 수차례 반복한 점도 참석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다. 김 보좌관은 “대통령이 북한만 챙기고 경제는 안 챙긴다고 하는데, 아세안 순방 때 경제를 제일 많이 챙긴 사람이 누구냐”고 말한 뒤 각 기업의 현안을 해결한 사례를 나열했다. 그는 “이렇게 세일즈하는 사람이 문 대통령이고 우리 정부”라며 “이렇게 하는 게 반기업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아세안 국가들이 한국산 과일을 많이 수입한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우리 농민들이 농산물 수입을 기를 쓰고 반대하는데,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조찬강연회 참석자들은 김 보좌관의 발언에 대해 “현실을 전혀 모르고 얘기하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중동 발언’과 다를 게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향해 ‘중동으로 가라’고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문 대통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청년 실업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강구돼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중동으로 가라는 엉뚱한 대책을 내놓고 있으니 참으로 황당하다”고 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김 보좌관은 “신남방지역에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맥락의 얘기였다”며 “50, 60대를 무시한 발언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아세안 국가로 직업을 찾아 떠나라는 말에 대해서도 “우리 젊은이들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자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했다.
그는 오후 늦게 한 차례 더 입장문을 내고 “신남방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표현으로 심려를 끼쳤다”며 “저의 발언으로 마음이 상하신 모든 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한발 물러났다.
도병욱/박재원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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