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38) 무의미(無意味)
우리는 왜 삶을 연명하는가
소박하지만 목적이 있는 사람들, 해야 할 일 위해 헌신적으로 몰입
혹독한 환경 속 생존 가능성 높아
마지막을 준비하다
가축떼 살육했던 칼 지닌 채, 숲을 지나 해변 후미진 곳으로
깊이 판 모래는 칼자루 움켜쥐고 날카로운 칼끝이 하늘 향해 솟아
나는 왜 사는가? 내가 삶을 연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스트리아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1905~1997)은 독일 나치 수용소에서 그가 생존한 이야기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1946년)이란 책에 생생하게 기술했다. 그는 1942~194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수용소 네 곳에서 노역을 하면서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감금돼 있던 부모와 동생, 그리고 임신한 아내가 죽는 과정을 목격했다. 프랭클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출구가 없는 캄캄한 심연에서 괴로워했다. 특히 자신의 분신인 가족과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뱃속에 있는 미래의 희망인 자식의 죽음은 그를 정신적·영적으로 가사(假死) 상태에 빠지게 했다.
의미(意味)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관찰한 동료 유대인들의 행동을 토대로 인생이 품고 있는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됐다.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고통은 자신의 소홀, 실수 혹은 잘못을 통해 생기기도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욥은 당대 최고 부자였다. 그러나 욥기에 의하면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식마저 사고로 사망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온몸이 몹쓸 피부병에 걸려 길바닥에 앉아 기왓장 조각으로 몸을 긁는 신세로 전락한다. 프랭클이나 욥에게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과 사라진 사람들의 차이를 발견했다. 생존한 사람들은 자신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목적은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소박함, 혹은 완성하지 못한 책을 출간하고 싶은 희망, 사랑하는 연인이나 손주를 보고 싶은 간절함 같은 것들이다. 프랭클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목적이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희망을 포기한 사람보다 혹독한 환경을 잘 견뎌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은 항상 다음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하며 성장한다. 내가 이미 성취한 것과 내가 성취해야 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자신의 삶을 통해 좁혀져야 한다. 이 노력이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든다. 만일 내가 이미 성취한 것에 안주한다면, 오만(傲慢)과 진부(陳腐)가 나를 옭아맨다. 그러나 내가 내게 주어진 삶에서 완수해야 할 과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몰입한다면, 그 과정이 나를 참신(新)하고 겸손(謙遜)하게 만들 것이다. 참신이란 과거와의 매정한 결별이며, 겸손이란 앞으로 발견해 성취할 자신이 현재의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고백이다.
프랭클은 의미가 있는 삶을 ‘로고스(logos)’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 개념을 이용해 설명한다. 로고스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추구해 성취시키는 훈련이다. 인생을 작동시키는 원동력은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快樂)’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그러기에 남들에게서 아름다운 삶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데 있다.
무의미(無意味)
만일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들기 위해 ‘의미’있는 임무를 찾지 못한다면, 인간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중독(中毒)은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 의존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도피 행각이다. 이 도피는 나의 개성과 원기를 말살해 점점 나를 무생물로 만든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고백론》(1882)에서 인간의 무의미와 허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 삶은 서 있다.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잠을 자지만, 이것은 인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성적이라고 여길 만한 인생의 성취에 대한 바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열망한다면, 그것은 내 욕망을 채우든 채우지 않든, 그것은 아무 소용 없다.(…) 인생의 진실은 이것이다. 인생은 무의미(無意味)하다. 나는 연명하고 연명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가파른 절벽에 도착했다. 멈출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다. 눈을 감을 수도 없다. 내 눈 앞에는 고통과 완벽한 소멸인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아스는 지난밤 광기에 빠져 가축을 살육한 자신의 행각을 보고 깊은 실의에 빠진다. 그리스 군인들을 이끌고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벽과 같은 아이아스’는 온데간데없고, ‘광인 아이아스’만 남았다. 영웅에 어울리지 않는 창피한 짓이 시간이 지나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명예를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로 여겨온 아이아스에게 자신의 행동은 치명적이어서 돌이킬 수 없다. 아이아스는 외친다. “내 아내 테크멧사를 내 적들 사이에 과부로 버려두고, 내 아들을 고아로 남겨두자니,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하지만 목욕하는 장소와 해변의 풀밭을 찾아가 이 더러운 것을 정화할 것이다.”(652~655행)
아이아스는 가축을 살육한 칼을 들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에 갈 것이다. 이 칼은 트로이 왕자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이다. 그는 이 칼을 특별한 방식으로 ‘정화’할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깨닫는다. “나는 적을 미워하되, 나중에는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미워하고, 친구에 관해 말하자면 언제까지나 친구로 남지 않을 것처럼 베풀고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678~682행) 그러고는 아내 테크멧사에게 막사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마지막 길을 보지 말라고 말한다. 전우들에게는 자신의 이복동생 테우크로스에게 뒷일을 부탁하라고 당부한다.
자기희생(自己犧牲)
합창대는 아이아스가 스스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아이아스는 그가 저지른 일을 보고는 그리스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자신을 엄숙한 제물로 바칠 것이다. 멀리서 전령이 무대로 올라와 아이아스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은 동생 테우크로스가 도착했다고 알린다. 전령은 예언자 칼라스의 경고를 알린다. “만일 아이아스가 살아있는 모습을 그리스인들이 보길 바란다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막사 안에서 떠나지 말게 붙들어야 한다. 만일 아이아스가 막사를 떠난다면, 아테나 여신의 노여움으로 그는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할 것이다.”
아이아스는 오래전 이미 아테나 여신의 미움을 샀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테나 여신이 자신을 도우려 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신이시여, 가서 다른 아르고스인들이나 도와주세요. 내가 싸우는 곳에서는 전열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774~775행) 인간인 아이아스에게 모욕을 당한 아테나 여신은 언젠가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테크멧사와 테우크로스, 그리스 군인들은 사방으로 아이아스의 발자취를 뒤쫓아 간다. 아이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나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이아스는 숲과 덤불을 지나 해변의 후미진 곳에 도착했다. 그는 헥토르에게 뺏은 칼을 칼집에서 꺼낸다. 자신의 방패와 투구, 창을 질서정연하게 옆에 세운다. 그러고는 모래를 깊이 파서 칼머리를 단단히 묻고 칼끝을 직각으로 세웠다. 그는 다시 흙을 손으로 모아 칼이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칼끝이 정확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 올랐다. 영웅 아이아스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기에는 자신의 행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비참하다. 그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통과해 생명을 앗아갈 칼날을 보고 말한다. “가장 효과적으로 벨 수 있도록 살인자가 우뚝 서 있구나.(…) 내게 가장 큰 호의를 베풀게나. 내가 빨리 죽게 너를 고정해 놓았지. 이제 준비는 끝났어.(…) 제우스 신이여! 그대가 나를 도와주소서. 청하건대, 내가 피투성이가 될 이 칼 위에 쓰러지면, 그대는 테우크로스에게 사자를 보내 흉보를 알리고, 그가 가장 먼저 나를 들어올리게 해주소서. 내 적들 중에 누군가 나를 발견해 개 떼와 새 떼에게 먹이로 주지 않도록 막아주소서.”(815~828행) 이 칼은 아이아스의 오른쪽 옆구리를 통과해 왼편 어깨로 나올 것이다.
아이아스는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 인간은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생존하면서 고통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고통이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신호등이란 사실을 안다. 그러나 고통의 ‘무의미’는 견딜 수 없다. 무의미는 인생을 망치는 시퍼런 칼날이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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