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로 부회장 "기술보국이 사업 원동력…新사업 할 때마다 국산기술 영토 넓혔죠"

입력 2019-02-06 16:34   수정 2019-02-07 13:01

한경 인터뷰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국산화한 '정기로' AP시스템 부회장

ETRI 출신 6번째로 창업
1997년 반도체 SW 자체 개발…대기업에 공급하며 점유율 90%로
25년 만에 매출 1조로 키워

25년간 끊임없이 도전
금융위기 때 AMOLED 투자…본사·토지 팔아가며 자금난 극복
"국부 유출 없도록 R&D 지속"



[ 김기만 기자 ]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정기로 AP시스템 부회장(사진)은 ‘사업을 하면서 많은 위기를 어떻게 넘겼냐’는 질문에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를 인용했다. 그가 회사를 키워온 과정이 실제로 그랬다. 1994년 반도체 장비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코닉오토메이션(당시 사명은 코닉시스템)을 설립한 이후 위기와 도전은 늘 곁에 있었다. 국내 장비 제어 1세대 엔지니어인 정 부회장과 AP시스템은 25년간 끊임없이 변신했다. 미국과 캐나다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해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국내외 장비회사에 공급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반도체 장비를 공급하고, 디스플레이 패널 장비로 사업을 확장했다. AMOLED(능동형유기발광다이오드) 장비 사업은 다른 경쟁사보다 빨리 시작했다. 1조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리는 회사가 됐다. 정 부회장은 기업을 일구고 사업을 키워가는 동력으로 자생력을 꼽았다. 그는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국산 기술로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는 ‘기술보국’을 가치로 세웠다”며 “한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안주하지 않고 다음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면서 사업이 지속해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직원 세 명으로 소프트웨어 사업 시작

정 부회장은 1986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를 졸업하고 30대 초반이던 1994년까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근무했다. 그는 “ETRI에 재직하면서 반도체 장비를 국산화하는 개발과제 중 장비 제어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다”며 “10여 년의 연구 경험을 살려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회사를 차렸다”고 했다.

연구원도 창업을 적극 권장했다. 정 부회장은 “1990년대 초 주변 연구원들이 전문성을 무기로 하나둘씩 창업에 나서는 분위기였다”며 “ETRI 출신 중에서 여섯 번째로 창업했다”고 말했다. 당시 ETRI 출신이 창업한 10여 개 회사 중 살아남은 회사는 한두 개밖에 없다.

그는 퇴직금(4000만원)과 지인, 가족으로부터 조달한 자금을 포함해 자본금 1억20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대전 유성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은 본인까지 총 세 명이었다. 첫 사업 분야는 반도체 장비 제어소프트웨어 개발. ETRI에서 연구한 실력을 살렸다.

정 부회장은 “삼성과 LG 등 대기업에서 반도체 양산 체제를 갖추는 시기였지만 장비와 소프트웨어는 모두 외국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며 “외국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해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국내외 장비회사에 공급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97년부터는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 ‘이지클러스터(EasyCluster)’를 공급하며 시장점유율을 90%로 끌어올렸다.

외환위기 때 반도체 설비 사업 진출

정 부회장은 소프트웨어 사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드웨어도 해보기로 결정했다. 1997년이었다. 첫 아이템은 반도체 장비 중 수입에 의존하던 급속 열처리 RTP(Rapid Thermal Processing) 장비였다. 쉽지 않았다. 신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외환위기가 터졌다. 회사는 자금난에 처했다. 직원 월급도 제대로 못 줬다. 정 부회장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대기업이 시설투자를 보류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고 했다. 이 위기를 힘겹게 버텼다. 그는 “2000년대 초 벤처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삼성벤처투자를 비롯한 10여 개 기관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위기를 벗어났다”고 설명했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장비 국산화를 추진하던 삼성전자와의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졌다. RTP 장비에 이어 LCD(액정표시장치) 장비인 ODF(One Drop Filling)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ODF는 LCD 생산 과정에서 활용하는 액정적하 방식의 액정 주입 장비다. 2001년 아파트형 공장에서 벗어나 경기 동탄에 3300㎡(1000평) 규모의 공장도 지었다.

선제적으로 AMOLED 장비 투자

정 부회장과 AP시스템은 AMOLED 시장에 선제적으로 뛰어들었다. 2008년 AMOLED 패널을 생산하기 위한 시설에 투자하고, AMOLED용 레이저 결정화 시스템을 개발했다. 정 부회장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시장이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대규모로 투자했다. 회사의 운명을 건 도박 같은 결단이었다”고 회상했다.

AP시스템은 이를 위해 제3공장 증축을 결정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위기를 맞았다. 정 부회장은 이번엔 버리는 전략을 택했다. 2009년 동탄 본사 건물과 토지를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 매각했다. 대규모 자금이 일시에 유입되면서 유동성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릴 때는 인원을 감축하기도 했지만 위기를 극복한 뒤 대부분 복직시켰다”고 전했다. 위기를 넘기자 AMOLED 제조 장비는 AP시스템의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기술보국’을 위한 3대 정신

정 부회장은 사업을 시작하며 ‘기술보국’을 창업정신으로 내세웠다. 경영에서는 일등정신, 프로정신, 모험정신을 경영 원칙으로 강조했다. 정 부회장은 “급변의 시기마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장비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며 “이를 통해 국내 반도체 생산설비를 국산화한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초기 시작한 소프트웨어 사업은 미국(RPI)과 캐나다(테크웨어) 제품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장비 등은 일본 회사(JSW, 히타치) 제품을 국내에서 밀어냈다.

AP시스템은 중국 시장에도 진출하며 매출을 다각화하고 있다. 중국 패널 제조사에 플렉시블 OLED용 레이저결정화(ELA), 레이저리프트오프(LLO) 등을 공급한다. 중국 고비전옥스(GVO), BOE 등이 고객사다. 2017년 AP시스템 매출은 9624억원에 달했다. 정 부회장은 “반도체 생산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국산화하면 국부가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고 국내 산업 기반이 튼튼해지는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며 “끊임없는 신사업 발굴과 연구개발을 통해 대한민국이 기술로 부강한 나라가 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AP시스템엔 '회장'이 없다?

정 부회장 "성장기회 많아…회장이라는 직함 안 쓴다"

AP시스템에는 회장이 없다. 창업자인 정기로 부회장이 그룹을 총괄한다. 지주회사 APS홀딩스의 자회사는 AP시스템, 디이엔티, 코닉오토메이션, 제니스월드, 넥스틴 등 5개사다. 정 부회장은 “AP시스템은 아직 성장할 기회가 많은 중견기업인 만큼 ‘회장’이라는 직함을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엔지니어로서 겸손한 성품도 정 부회장이 직함을 고수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는 수천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일군 뒤에도 공장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또 특별히 외부 일정이 없으면 동탄의 두 개 공장을 오가며 신사업을 구상한다.

정 부회장이 1994년 창업할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선후배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만류한 이유도 그의 조용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도 외부 활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신사업 구상에 몰두하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김기만 기자 m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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