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국 중국이 서방 노리개 전락
"그냥 이대로 살자" 규제가 자초
'광주형 일자리'는 미봉책일 뿐
기업 뛰놀게 할 '열린 나라' 돼야"
이학영 논설실장
[ 이학영 기자 ]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캐나다의 토론토와 밴쿠버, 호주 시드니 등 ‘신대륙’ 대도시에는 공통적인 풍경이 있다. 도심 노른자위 땅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씁쓸한 사연이 있다. 신대륙 국가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중국 하층민을 값싼 인력으로 사들여 도로 항만 교량 등의 건설에 대거 투입했다. 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중국인들이 인부로 팔려가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쿨리(苦力)’로 불리며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 역할을 대신했다.
금문교 등 호화로운 다리와 터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등 건축물, 대륙횡단철도가 지어지는 동안 수많은 쿨리가 목숨을 잃었다. 훗날 인권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보상으로 받아낸 게 도심의 부지였고, 갈 곳 없는 유족들이 모여 산 게 차이나타운이 됐다.
제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때 유랑(流浪)은 시작된다. 구한 말 이 땅의 백성들이 만주와 연해주의 동토(凍土)로, 하와이와 멕시코의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떠나간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도 중국의 쿨리처럼 부려지지는 않았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과학문명국가였던 중국이 ‘노예노동 수출국가’로 전락한 경위를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인류에 ‘근대(近代)’를 열어준 3대 발명품으로 꼽히는 화약, 나침반, 인쇄술은 모두 중국에서 발명했다. 유럽 국가들이 중세 암흑기를 떨쳐내며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대항해와 함께 ‘발견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건 중국의 발명품 덕분이었다. 그런 중국이 가진 힘을 써먹지 못한 채 유럽 국가들에 역습을 받고, 착취의 대상이 됐다. 중국을 자멸케 한 으뜸 요인으로 ‘규제’가 꼽힌다.
항해기술이 단적인 예다. 유럽이 대항해를 시작하기 전인 1400년대 초반, 중국은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 중동 인도를 일곱 차례나 항해했다. 서양의 동양 침탈 시발점으로 꼽히는 바스쿠 다가마의 1498년 인도 항해보다 100년 가까이 앞선 건 월등한 항해기술 덕분이었다. 바스쿠 다가마의 선단이 120t이었던 데 비해 정화의 함대는 8000t에 달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중국의 명나라 조정이 돌연 항해금지령을 선포했다. 중국인들이 외부와 접촉해 ‘불순사상’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규제는 중국이 축적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렸다. 원양항해가 금지되자 큰 배를 만드는 기술이 쓸모없어졌다. 항해뿐만이 아니었다. 변화를 거부한 채 ‘그냥 이대로 살기’를 선택한 중국 정부의 결정은 모든 분야에서 혁신의 동력을 실종시키고 나라 전체를 무기력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욕 가득한 중국의 역사는 정부가 규제 혁파를 정책의 최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기업과 대학, 연구소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개발 역량을 갖췄어도 사업화할 길이 보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지 않는데 좋은 일자리가 생겨날 수 없다. ‘혁신성장’과 ‘일자리 정부’를 모토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깊게 새겨야 할 교훈이다.
혁신과 성장, 일자리 어느 것도 규제에 발목이 잡혀서는 이룰 수 없다. 그런데도 바이오 공유경제 빅데이터 핀테크 블록체인 등 전 세계적으로 선점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분야들에 대한 규제 빗장이 여전하다. 바이오 정보기술(IT) 분야 기업들이 규제를 견디다 못해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로 ‘사업 망명’에 나서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설 연휴 직전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그룹, 지역 노동·시민단체의 합의로 결정된 ‘반값 임금’의 자동차회사 설립은 나름의 의미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저임금 일자리 나누기가 ‘일자리 정부’의 간판 정책이 돼서는 곤란하다. 사회 전체 발전에 기여하며 높은 급여도 받게 해줄 일자리 창출이 시급하다. 그렇게 하려면 기업가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규제 혁파다.
문재인 대통령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규제와의 전쟁’을 강조한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규제 혁신은 기업의 투자를 늘리고, 새로운 산업과 서비스의 발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중요한 건 실천이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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