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규범 흐트러져 시장 혼란…다자주의·지역블록 붕괴
지표경기·체감경기 괴리 커져…경제지표 유용성 떨어져
총수요 관리는 해외누수로 효과 감소…총공급 정책 중시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 한상춘 기자 ]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이 ‘뉴 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규범과 이론, 관행이 통하는 ‘노멀’ 시대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앞으로는 미래 예측까지 어려운 ‘뉴 애브노멀’ 시대가 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경제 분야가 심하다. 자유방임 고전주의 ‘경제학 1.0’ 시대, 케인지언식 혼합주의 ‘경제학 2.0’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학 3.0’ 시대에 이어 ‘경제학 4.0’ 시대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 경제학 4.0 시대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국가’를 전제로 한 종전의 세계 경제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현상이다. 세계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파리 기후변화협정 등과 같은 다자주의 채널이 약화되는 추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주도의 다자 협상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각국의 국제규범 이행력과 구속력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역 블록은 붕괴 조짐이 일고 있다. 영국이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를 놓고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렉시트(그리스의 EU 탈퇴), 이탈렉시트(이탈리아의 EU 탈퇴) 등도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한 차원 낮은 미국·캐나다·멕시코 협정(USCMA)으로 재탄생했다. 다른 지역 블록은 존재감조차 없다.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양자 협력도 ‘스파게티 볼 효과’가 우려될 정도로 복잡해 교역 증진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처럼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국가 간 공동 이익을 도모하는 시장담합 기구도 무너지고 있다.
국제통화질서에서는 미국 이외 국가의 탈(脫)달러화 조짐이 주목된다. 세계 경제 중심권이 이동함에 따라 현 국제통화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 즉 △중심통화의 유동성과 신뢰성 간 트리핀 딜레마 △중심통화국의 과도한 특권 △국제 불균형 조정메커니즘 부재 △과다 외화보유 부담 등이 심해지면서 탈달러화 조짐이 빨라지는 추세다.
세계화는 쇠퇴, 국수주의 기승
현재 국제통화제도는 1976년 킹스턴 회담(길게는 스미스소니언 체제 포함) 이후 시장의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국가 간 조약이나 국제협약이 뒷받침되지 않아 ‘없는 시스템(non-system)’ 혹은 ‘젤리형 시스템(jelly system)’으로 지칭된다. 그 결과 킹스턴 회담 이후 달러 중심의 브레턴우즈 체제는 이전보다 느슨하고 불안한 형태로 유지돼 왔다.
시스템이 없는 국제통화제도에서는 기축통화의 신뢰성이 저하되더라도 이를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새로운 기축통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통화는 없다. 유일한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대외불균형을 시정하려고 하지만 무역흑자국은 이를 조정할 유인이 없어 환율전쟁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국제통화제도 개혁에 공감하는 학자는 최소한 불균형 조정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 간 조약’(예: 플라자 협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회담에서 ‘경상흑자 4% 룰’(GDP 대비 4%를 상회하는 경상흑자국은 시장 개입을 할 수 없도록 한 것)이 합의된 것은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조차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제금융기구의 분화 움직임도 뚜렷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우 중국판 IMF인 긴급외환보유기금(CRA)이 조성됐고, 유럽판 IMF인 유럽통화기금(EMF) 창설이 검토되고 있다. 중국 주도로 세계은행(World Bank)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대항하기 위해 신개발은행(NDF)과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이 설립됐다.
이념에 갇힌 경제 시각은 위험
‘틀’에 해당하는 국제 규범과 이를 토대로 한 세계 경제와 국제통화질서가 흐트러지면 경제주체(시장 포함)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포퓰리스트가 판치면서 국수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세계화의 쇠퇴를 의미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zation)’이란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 제시된 ‘세계화 4.0’과 같은 의미다.
‘외부성(externality)’도 급증해 국가 개입이 늘어난다. 외부성이란 사적 비용(PC)과 사회적 비용(SC) 간 괴리가 나타나는 현상으로, ‘인간은 합리적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경합성과 배제성의 원리가 흐트러진다. 외부성은 PC보다 SC가 적은 경우 ‘외부 경제’, 반대의 경우 ‘외부 불경제’로 구분된다.
외부성으로 ‘인간은 합리적이다’는 경제학의 전제가 흔들리면 ‘가치(value)’가 ‘가격(price)’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현실진단 자료로서 경제지표의 유용성이 떨어진다. 지표경기와 체감경기 간 괴리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이런 여건에서 추진되는 경제정책은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 즉 경제주체와 시장 반응까지 감안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작년 10월 이후 미국과 한국 경제처럼 지표상으로는 괜찮은데 경제주체가 침체를 우려하고 시장은 주가 폭락 등으로 과민하게 반응했던 상황을 가정해 보자. 프레이밍 효과를 중시하는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금리인상 속도 조절 등으로 경기와 시장을 안정시키지만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국의 일부 경제 각료와 진보학자는 ‘위기를 조장하는 가짜 미네르바 세력’으로 무시한다. 심지어는 경제전망기관의 비관적인 예측까지 간섭하거나 정책 목표에 부합하는 통계만 발표한다.
오히려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 등을 활용해 경제지표와 경제주체의 반응 간 괴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책당국의 바른 모습이다. 텍스트 마이닝이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를 올리겠다고 발언한 이후 매파적 성향의 어조는 ‘+1’, 비둘기파 성향의 어조는 ‘-1’로 빅데이터 지수를 산출해 경제주체의 반응을 파악하고 시장 친화적으로 조절해나가는 기법을 말한다.
'갈라파고스 함정'에서 벗어나야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시계열 자료를 토대로 한 각종 모델에 의한 전망치도 예측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IMF, Fed를 비롯한 전망기관이 예측 주기를 ‘분기’로 단축시켜 대응한 지 오래됐다. IMF의 기업취약지수(CVI), 일본은행(BOJ)의 대차대조법(BS) 방식, 미국 경기사이클예측연구소(ERCI)의 큐브 방식 등 새로운 예측기법도 제시되고 있다.
경기대책도 총수요 관리보다 총공급 중시 수단이 더 효과적이다. 경기를 부양하는 경우 케인지언 방식대로 재정지출을 늘리거나 정책(기준)금리를 내린다면 해외 누수로 효과가 반감된다. 감세, 세제 혜택, 경영권 방어, 규제 완화 등으로 경제주체가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파고들어야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슬로벌라이제이션’으로 대변되는 경제학 4.0 시대엔 한국처럼 대외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일수록 불리하다. 대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다.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져 경제학 4.0 시대에 나타나는 변화를 읽지 못한다면 선진국 문턱에서 추락해 ‘중진국 함정’에 빠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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