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희수 기자 ]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가 큰 논란이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국내주식 수탁자 책임활동 가이드라인’을 통해 한진칼 경영 참여에 이어 남양유업에 배당 확대를 위한 주주 제안을 의결했다. 여기에다 국민연금은 보유주식이 일정 수준 이상인 기업에 대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주주총회 전 미리 공개하겠다고 나섰다.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에서 다른 기관과 달리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원칙이 있다. 바로 주인과 대리인 문제다. 국민연금 기금의 주인은 보험료를 내는 전 국민이다. 소관 부서인 보건복지부와 수탁자책임위 등 산하 기구는 주인을 대신하는 대리인일 뿐이다. 선의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해충돌…중립이 가장 공정
국민 의사는 대부분 갈린다. 그래서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주인인 국민의 찬반 의사 표명이 없는 이상 대리인이 그 방향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원천적 한계가 있다. 예컨대 A기업이 B기업을 인수할 때 국민연금은 어느 편도 들어선 안 된다. 양측 주주 간, 또 각 기업의 주주 간 이해가 충돌하므로 국민연금은 중립을 지켜야 공정한 것이다. 모든 주주가 국민연금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특정 기업의 주요 안건도 주주 간 이해 충돌이 있는 한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옳다. 특정 기업에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그것은 관련 부처에서 법규와 규정 위반을 따져 처리할 일이다. 국민연금이 공권력을 대신할 순 없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주식매매 내역도 나중에 공개한다. 그런데 기업 경영권에 민감하게 작용할 의결권 행사 방향을 미리 공개하겠다고 한다. 대상 기업이 간판 기업을 포함, 100곳이 넘는 지경이다. 다른 기관과 일반 주주들이 줄을 설 것이다. 일자리가 부족해 기업 투자 확대를 독려하는 마당에 투자 여력을 잠식할 고배당을 무턱대고 요구하는 것도 논리가 맞지 않는다. 말을 안 따르는 기업을 망신 주고, 벌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게 무리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연금이야말로 지배구조를 최우선적으로 바꿔야 한다. 정부든 정치권이든 의결권과 관련해 이래라저래라 주문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대리인이 주인 행세를 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경영 침해 논란까지 빚을 정도라면 월권 내지 권한 남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 독립이 먼저다
국민연금을 정치와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 오로지 국민의 노후자금을 보전하고 키우는 본연의 역할에 몰입하도록 해야 한다. 복지부 장관이 맡고 있는 기금운용위원장부터 바꿔 정치적으로 중립인 시장형 민간 인사를 최소한 공동위원장으로 둬야 한다. 산하 기구는 말할 것도 없다. 북유럽 국가들도 시행착오 끝에 좌파 정권, 우파 정권 구분없이 국민연금을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미래세대가 큰 짐을 지게 해선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서다. 얼마 전 방한했던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 아태지역 대표가 “이사회에 정부 인사는 한 명도 없으며 최고경영자 선임에도 정부나 의회가 관여할 수 없게 돼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고갈이 예정돼 있다. 그렇지만 정작 국민연금 수익률은 지난해 마이너스(11월 기준)로 추락했다. 대리인이 본연의 업무를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진 제도를 도입했다면서 대전제인 기본 원칙은 따르지 않는다. 국민연금을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 직역연금과 혼동해선 안 된다. 물론 권력 기구나 지주회사처럼 될 수도 없다. 대리인의 책무를 숙고하시길.
m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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