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3일 1343명 뽑는 전국동시조합장선거
최대 2억 연봉에 막강한 권력
득표율 15% 돼도 비용보전 안돼
"일단 되고 보자"…혼탁 불가피
조용한 동네가 '원수되기' 일쑤
전남 곡성엔 괴문서 잇단 살포
비방·현금매수…고발 줄이어
신고포상금 최고 3억으로 증액
현재까지 포상금만 3700만원, 조합원들간 공명선거 활동도
"현직에 유리, 신인에 불리한 現 선거법이 불법조장" 주장도
[ 이현진 기자 ]
지난달 초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는 A씨는 아침부터 요란스레 울리는 초인종에 현관문을 열었다. 조합 일을 하며 한두 번 인사를 나눴던 B씨가 그의 부인과 함께 서 있었다. “어쩐 일이냐”고 묻자 B씨는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슬그머니 현금 봉투를 내밀었다. 당황한 A씨가 손사래를 쳤지만 B씨는 “고생 많으신데 그냥 받으세요”라며 A씨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B씨는 이런 방식으로 투표권을 가진 조합원 수십 명에게 총 350만원을 뿌렸다.
이 같은 B씨의 ‘매표 활동’은 돈을 받은 조합원 5명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면서 덜미가 잡혔다. A씨는 “마음이 불편해 잠도 오지 않았다”며 “최근 조합장선거에서 돈을 뿌린 후보가 고발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신고했다”고 털어놨다. 선관위는 지난 14일 B씨를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현금 뭉치·괴편지가 도는 시골마을
다음달 13일 치러지는 제2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가 한 달 가까이 남았다. 공식 선거운동은 이달 말인 28일부터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장에선 뜨거운 득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전 선거운동은 불법인데도 많은 후보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번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전국 농협·수협·산림조합의 조합장은 총 1343명. 이들에겐 임기 4년 동안 5000만~2억원 상당의 연봉이 보장된다. 인사 및 각종 사업권에 개입할 권한도 있다.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후보자들이 불법을 무릅쓰고 당선에 목을 매는 이유다.
가장 흔한 유형은 역시 금품 및 향응 제공이다. 모 조합장선거에 입후보한 C씨는 지난달 중순 조합원들의 집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하며 4명에게 현금 200만원을 제공했다. 그에게 돈을 받은 조합원은 “C씨가 5만원권을 10장씩 말아서 고무줄로 묶은 뒤 악수하며 건넸다”고 전했다. 같은 시기 경남 통영에서는 현직 조합장이 2500만원 상당의 농협 상품권을 구입해 조합원 8명에게 10만원어치씩 돌렸다. 그는 선관위 조사가 시작되자 “현금으로 바꿔줄 테니 내가 준 상품권을 돌려달라”고 증거인멸을 시도하기도 했다.
출처를 알기 힘든 괴소문도 심심찮게 떠돈다. 지난 13일 곡성농협 조합원 200여 명에게는 ‘곡성농협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명의의 편지가 배달됐다. 여기에는 “현직 조합장이 일은 안 하고 놀러 다니기만 한다”, “상임이사는 금고 돈으로 도박을 해 문제가 많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 70대 조합원은 “선거철만 되면 서로를 깎아내리는 온갖 추잡한 소문이 동네에 퍼진다”며 “계속 얼굴을 맞대고 살 사람들인데 진절머리가 난다”고 꼬집었다.
지금까지 선관위가 접수한 불법 선거운동 신고건수만 총 130건. 이 가운데 39건은 검찰과 경찰에 고발 조치됐다. 선관위 관계자는 “주로 영농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선거라서 정책보다는 학연 혈연 등 조합 내 연고를 중심으로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선거인단 규모가 크지 않아 매수 등 위법 행위가 일어나기 쉬운 데다 이게 범죄라는 의식조차 없는 유권자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돈선거’ 오명 벗을까
조합장 직선제는 1989년 시작됐다. 초기부터 ‘돈선거’라고 불릴 만큼 혼탁했다. 1989년부터 2005년까지 크게 네 차례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59명이 불법 선거운동으로 구속됐다. 갈수록 불법 선거운동이 판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05년부터 위탁관리를 시작했다. 공직선거에만 적용하던 신고포상금 제도와 50배 과태료 부과 제도까지 도입했다. 조합별로 치르던 선거도 통합했다. ‘위탁선거법’을 제정해 선거 절차 및 선거운동 방법을 단일화했다. 이에 근거해 2015년 3월 11일 첫 전국동시조합장선거가 치러졌다. 국민적 관심이 커지면서 평균 80.2%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물밑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불법 선거운동은 여전하다는 게 선관위 측 설명이다. 다만 이번 선거를 앞두고 신고건수가 늘었다는 점은 다소 고무적이다. 올해부터 신고포상금을 최고 3억원(기존 1억원)으로 높인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이번 선거와 관련해 현재까지 지급된 포상금은 총 3700만원이다. 충남에서 입후보 예정자가 조합원들의 집을 방문해 총 200만원의 현금과 홍삼을 제공한 일을 신고한 사람에게 2000만원이 지급됐다. 조합원의 자택과 농장을 방문해 43만원 상당의 물품을 건넨 입후보 예정자를 신고한 경남의 한 조합원도 110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조합원 사이에서도 “지역과 조합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뿌리뽑자”는 목소리가 높다. ‘불법 선거운동으로 재선거가 이뤄지면 조합의 추가 부담액을 모두 변상하겠다’는 서약을 후보자들에게 받기로 한 ‘좋은농협만들기 국민운동본부’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위탁선거법이 지나치게 엄격해 오히려 불법 선거운동을 조장한다는 의견도 있다. 충남의 한 조합장 후보자는 “법이 허용하는 선거운동 폭이 극히 좁고 예비후보자 등록제도도 없어 신인들은 13일의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 얼굴을 알리기 어렵다”며 “현직이 극히 유리한 선거”라고 주장했다. 1회 선거에서 1326개 조합 중 현직 조합장이 당선된 비율(출마하지 않은 현직은 제외)은 64.6%에 달했다. 공직선거법과 달리 득표율 15%를 넘으면 선거비용을 보전해주는 제도가 없어 유력 후보자들이 당선에만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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