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태 기자 ]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최근 각각 4건과 3건의 ‘규제 샌드박스’ 대상 사업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3건이 헬스케어 분야 사업이다. 암 등 중증질환의 소비자 의뢰 유전자검사(DTC) 허용, 심장 질환자 원격 모니터링, 모바일 앱(응용프로그램)을 통한 임상시험 참여자 모집이 그것이다. 헬스케어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읽힌다.
규제 혁신 첫발 뗐지만
DTC 규제 샌드박스는 파격적이다. 대장암 위암 뇌졸중 파킨슨병 등 중증질환이 포함돼서다. 인천 송도 주민으로 한정되긴 했지만 미국 일본 등 외국처럼 병원을 찾지 않고도 DTC업체에 타액을 보내기만 하면 질환을 유발하는 유전자의 유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국내 의료계는 과잉진료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워 질환 관련 DTC 허용을 반대해왔다. 2016년 DTC를 도입하면서 혈당 탈모 등 웰니스 관련 12개 항목으로 엄격히 제한한 것은 의료계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지난 3년 동안 산업계는 꾸준히 DTC 규제 완화를 요구했지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매번 시늉만 냈다. 의료계의 눈치를 보느라 한 발짝도 못 나아갔다.
심장 질환자 원격 모니터링 사업도 다르지 않다. 국내 벤처기업 휴이노와 고려대 안암병원이 손목시계형 심전도 장치를 활용해 심장 질환자를 원격으로 관리하는 서비스다. 환자가 30초간 심전도를 측정해 의사에게 데이터를 전송하면 병원 진료 여부를 안내해준다. 지난해 10월 출시된 애플워치4에 탑재된 기능이다. 휴이노는 애플보다 이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도 원격의료를 금지하는 의료법에 막혀 제품 출시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규제 샌드박스가 산업계의 숙원을 풀었다는데도 산업계의 반응은 냉랭하다. 정부가 앞으로 규제 샌드박스 사업을 차근차근 늘려가겠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도 그렇다. 왜 그럴까. 규제 샌드박스도 여느 시범사업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불신에서다. 오죽하면 ‘일회성 이벤트’라는 비판까지 나오겠는가. 2년의 샌드박스 유효기간이 끝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20년째 시범사업만 반복하고 있는 원격의료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원격의료는 대형병원으로의 의료 수요 쏠림 현상을 부추길 것이 뻔하고 문진 청진을 제대로 못해 의료사고 위험을 키울 수 있다는 일부 의사와 시민단체의 반대 논리에 갇혀 있다. 질환을 제때 관리해 병의 악화를 막고 환자들의 치료비 부담을 낮춰주자는 산업계의 목소리는 뒷전이다. 외국에선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원격 모니터링이 일상화되고 있고 모바일 헬스케어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지만 한국은 갈라파고스 신세가 됐다.
서둘러야 할 제도 개선
결국 규제 샌드박스의 성패는 제도 개선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무부처가 칼자루도 내려놔야 한다. 오죽하면 복지부와 DTC 허용범위 확대를 논의 중인 산업계가 마크로젠의 DTC 샌드박스 사업으로 자칫 동티가 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겠는가. 규제 샌드박스가 혁신적인 기술과 서비스가 자유롭게 현장 실험을 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되도록 하는 것도 정부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얽히고설킨 기존 제도의 틀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융합 기술이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원한 사업은 모두 허용해야 한다”는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의 지적이 그래서 일리가 있다. 이제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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