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된 '행남' 사명 버리고 '스튜디오썸머'로 변경
[ 전설리 기자 ]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자기 그릇 세트는 혼수 기본 품목이었다. 4~6인용으로 최소 10개 이상의 그릇을 한꺼번에 샀다. 생활 필수품이기도 했다. 올봄 결혼하는 30대 직장인 A씨의 혼수 품목에 그릇 세트는 없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한 뒤 예뻐 보이는 2인용 밥·국그릇과 수저 두 벌 정도만 단품으로 구매했다. 맞벌이인 A씨 부부는 집에서 밥을 해먹을 시간이 없다. 주말엔 맛집 탐방을 할 계획이다.
1인 가구 증가, 작은 결혼식, 외식·간편식 확산 등 생활 방식의 변화로 국내 도자기 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국내 전통 도자기업체들은 실적 악화로 백화점 매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혼수용 세트’란 낡은 전략을 버리지 못한 결과다. 이 틈새를 해외 브랜드가 파고들었다. 도자기업계 한 관계자는 “연간 3000억원 정도로 추산되는 국내 도자기 시장에서 국내와 해외 브랜드 매출 비중은 2 대 8 정도로 해외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적 악화 시달리는 토종 도자기업체
행남자기는 과거 한국도자기와 함께 국내 시장을 양분하던 회사였다. 하지만 최근 77년 된 ‘행남’이란 사명을 버리고 영화사가 됐다. 영화사 출신 임원을 잇달아 영입한 뒤 지난달 주주총회를 통해 상호를 아예 ‘스튜디오썸머’로 바꿨다. 시장에서 밀려난 행남은 조미김, 생활가전 등 신사업을 찾아나섰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11년 500억원대였던 매출은 2017년 100억원대로 추락했다. 줄어든 매출에서 도자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새로 진출한 조미김 사업보다 작았다.
한국도자기와 젠한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11년 500억원에 육박했던 한국도자기 매출은 2014년 300억원대로 떨어진 뒤 계속 줄고 있다. 최근 5년간 영업이익이 10억원을 넘긴 해가 없었다. 한때 200억원대였던 젠한국 매출도 2017년 100억원대로 내려앉았다. 도자기업계 관계자는 “최근 5년간 전통 도자기업체의 매출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며 “저가 제품은 중국산에, 고가 제품은 영국 등 유럽 브랜드에 밀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한국도자기, 행남자기, 젠한국 3사의 주요 3대 백화점(롯데·신세계·현대) 입점 매장은 최근 5년 새 절반 가까이 줄었다. 2015년 말 76개였던 매장 수는 현재 41개다.
‘인스타그래머블’만 살아남는다
지난해 국내 3대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도자기 브랜드는 덴비(영국), 빌레로이앤보흐(프랑스), 포트메리온(영국) 등이다. 국내 브랜드로는 놋담 정도만이 백화점 매출 상위에 들었다. 포트메리온 등 해외 도자기 브랜드는 한국 식문화에 맞는 제품을 내세워 시장을 확대하는 전략을 썼다. 서양 식문화에 맞는 접시 위주의 제품 구성에서 벗어나 밥공기 국그릇 면그릇 찬그릇 등을 선보였다. ‘한국 식문화에 맞는 이국적인 디자인의 제품’이 인기 비결이다. 이들은 비싼 고급 그릇을 사는 소비자들이 ‘플레이팅(그릇에 음식을 예쁘게 담아내는 방법)’을 목적으로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 인스타그램 등에 올리기 좋은)’한 제품을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마케팅을 강화했다.
전통 도자기업체들이 밀려나자 시장에 뛰어든 국내 신생 브랜드도 있다. 놋담 오덴세 등이 대표적이다. 놋담은 국내 도자기업체 죽전도예가 2014년 내놓은 국내 토종 유기(놋그릇) 브랜드다. 전통적인 소재인 유기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입혀 시장에 자리잡았다. 놋담 관계자는 “유기는 보온 보랭 효과가 뛰어나고 깨지지 않아 영구적”이라며 “무엇보다 최근 유행하는 그릇과 함께 놓으면 멋스러워서 SNS 이용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CJ계열의 오덴세는 드라마·예능 PPL(간접광고) 등 효과적인 마케팅으로 지난해 매출 150억원을 기록했다.
신생 국내 브랜드의 성장에도 해외 브랜드를 찾는 소비자가 많아 당분간 도자기 시장은 외국계가 주도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국내 전통 도자기업체 광주요그룹 조태권 회장은 “국내 도자기가 국내외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품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한식 문화를 전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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