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는 마지막 에세이를 통해 나의 오늘을 있게 해준 은사님 몇 분을 회고하고자 한다. 필자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교과서를 헌책방에서 사는 것이 흔했다. 그마저 살 돈이 없어 첫 한문시간에 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들어갔다가 한문 선생님께 “돈이 없어 책을 못 산 것이 자랑이냐”며 호되게 회초리를 맞았다. 필자는 그날 책을 전부 베껴 다음날 가져갔다. 요즈음에도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당시를 회상하면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중학교 입학은 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1년을 미루다 결국 자퇴했다. 회초리를 드신 한문 선생님은 필자에게 검정시험을 통해 고등학교 진학길을 열어주시고 3학년 선생님 반 청강생으로 학교에 다니게 해주셨다.
명문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은 했으나 어린 마음에 빨리 취직하기 위해 6개월 만에 자퇴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이를 아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자퇴한 학교를 찾아가 복학을 청원했고, 담당 선생님께선 이를 흔쾌히 받아주셨다. 나중에 도교육감을 거쳐 문교부 차관을 지낸 이 선생님은 아직도 내 인생의 등불로 남아 있다.
대학을 다닐 때 필자는 4·19혁명과 6·3사태를 겪었다. 당시 거대 담론으로 일관하던 학내 분위기상 학생들 사이에는 공인회계사를 무시하거나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응시나 합격 자체를 비밀로 할 정도였다. 그런데 경제학과 교수께서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여러분의 전도에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응시를 공개적으로 독려했다. 교수님의 격려에 취득한 자격증은 이후 삶에 큰 도움이 됐다. 지금 당장 하찮아 보여도 소홀히 하지 않고 대비하면 요긴하게 사용될 때가 있다는 귀중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국무총리를 지낸 뒤 70세에 다시 학교에서 공자의 《논어》를 영어로 강의하시던 일석 변영태 교수님(1892~1969)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교수가 결강할수록 권위가 높아진다는 쪽이었다. 선생님은 100분 강의시간을 단 5분도 허비하지 않았고, 의자에 앉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나면 전국을 돌며 아령을 들고 건강 강의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필자가 여든 가까운 나이에 체육학 박사가 돼 건강에 관한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데는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존경의 염(念)을 바친다. 오늘날 교직에 종사하시는 분들께 이 글이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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