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질적 변화시킨 최초 계기
新독립선언의 실천 의지 벼려야"
윤명철 < 동국대 교수·역사학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한복판에서 33인이 서명한 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2000만 명의 국민은 비로소 일제에 나라를 잃은 현실을 자각했고, 나라를 되찾는 독립투쟁에 동참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데 나라를 빼앗기기 전부터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했다. 곳곳에 세운 크고 작은 학교에서 역사와 전투 방식을 가르치고 군대도 조직했다.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처럼 의거를 하고, 목숨을 바친 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질서에 변화가 생겼고, 약소민족들의 처지가 개선될 듯 보였다. 그러자 몇몇 지사들은 독립투쟁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 무오년(戊午年)인 1919년 2월 1일 만주에서 39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최초의 독립선언서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대한’이라는 정식 국호와 ‘독립’이라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대한제국’은 자주성을 지키고, 시대정신을 반영해 채택된 역사적인 용어이므로 일본은 법령을 제정해 ‘한국’이라는 용어를 못 쓰게 하는 대신 ‘조선’이라는 용어를 강요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는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았고, 청산리 전투에서처럼 ‘대한독립군’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했다.
또 민중적인 언어를 사용했고, 평화와 대화가 아닌 ‘육탄혈전(肉彈血戰)’과 같이 전투성을 강조했다. 서명한 39인은 대부분이 만주와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온 독립투사와 독립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제가 철저하게 부정했던 단군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독립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선언서 작성 주체를 비롯해 서명한 이들은 민족 종교이면서 독립군의 주역이었던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이 선언서의 발표를 시작으로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전조선 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유학생들이 선언서를 발표했다. 다시 3월 1일, 서울에서 33인이 모여 조선독립의 의지를 표명하는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의 조계지에서 수립됐고, 청산리 전투 등에서 보이듯 대규모 조직적인 독립군 활동이 있었다.
이 일련의 흐름을 ‘3·1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민족사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질적으로 변화시킨 최초의 계기였다. 국민들은 무력한 나라와 지배세력에 본격적으로 분노했고, 식민지 국민이 돼버린 자신들의 무기력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반성하면서 ‘역사의 주체’가 돼갔다. 이런 의식은 훗날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거름 역할을 했다.
2019년 3월 1일. 이제 또다시 한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있다. 인류문명의 대전환과 우리를 끌어안고 벌어지는 세계질서의 격렬한 재편, 남북한의 대립과 충돌, 남한 내부의 각종 갈등들, 그리고 가중되는 경제적인 어려움들…. 모두들 현재의 상황과 곧 닥쳐올 미래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뭔가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고민하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3·1운동’이라고 불리는 역사, 그것을 촉발시킨 ‘대한독립선언서’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어떤 전략과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선 그분들이 내지른 함성과 휘날리는 태극기를 떠올리고 싶다. 우리 안에 가득한 불안감을 삭히며 용기를 가져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분들을 떠올리면서 다른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가슴을 껴안고 싶다. 그러면 또 다른 ‘신(新)독립선언서’를 훨씬 효율적으로 작성하고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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