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출판 경로도 눈길
[ 윤정현 기자 ]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직장인 작가’가 늘고 있다. 고위 임원으로 퇴직한 뒤 쓰는 자서전과 달리 현직 과장 및 차장들이 세대, 소통, 육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저자들의 직업도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에서 버스기사, 청소부, 소방관, 편의점 점주 등으로 폭넓어지고 있다. 생업 현장에서 건져올린 문장들은 독자에게 ‘힐링 창구’가 됐다. 회사 안팎의 경험을 공유한 글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글 쓰는 재미에 빠진 직장인들
‘향후 10년간 새로운 형태의 인재관리는 1960년대 마케팅이나 1980년대 품질관리 분야와 맞먹을 정도의 진보를 이룰 것이다.’ 최고인사책임자(CHO)나 최고전략책임자(CSO)가 쓴 글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출간되자마자 경제·경영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른 《90년생이 온다》의 저자는 신입사원 교육을 담당하다 현재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임홍택 CJ제일제당 과장이다. 20여 년을 출입국관리 공무원으로 일해온 이청훈 작가는 《비행하는 세계사》, LG전자에서 영업·마케팅 일을 하는 송창현 작가는 《직장 내공》을 지난 1월 출간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런 문장도 있다. ‘오전에는 선진국, 오후에는 개발도상국, 저녁에는 후진국 기사가 된다. 친절은 마인드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라는 생각을 한다.’ 전주 시내버스 기사인 허혁 작가의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중 일부다. 그는 “운전 중에 문득문득 글이 올라온다”며 “글 쓰는 재미가 들려 버스기사라는 직업을 대통령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한다. 편의점 점주인 봉달호 작가는 카운터 귀퉁이에서 영수증 종이에 틈틈이 쓴 글을 모아 지난해 9월 《매일 갑니다, 편의점》을 냈다.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편의점에서의 일상을 웃음으로 버무렸다. 그는 ‘일본 편의점 탐방기’로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두 책 모두 출간 후 1만 권 이상 팔리며 ‘평균 이상’의 성적을 내고 있다. 돈을 벌 목적도, 전업 작가가 될 계획도 없었다. 그저 일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글로 나누고 싶은 욕구에 책을 냈다. 출판계는 ‘공감’과 ‘위로’를 키워드로 한 에세이 열풍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대학 졸업 후 4년째 청소일을 하는 김예지 작가는 최근 《저 청소일 하는데요?》를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청소일로 돈을 벌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자아실현을 한다”고 말한다. 책을 만든 이보람 21세기북스 편집자는 “꿈과 직업을 분리해 생각하거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라는 이야기에 젊은 층이 공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콘텐츠 경쟁력, 콘셉트가 관건
출판 경로가 다양해지면서 직장인 작가들이 오로지 콘텐츠로 승부할 길도 열렸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매일 갑니다, 편의점》처럼 투고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통해 발탁되는 경우도 있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나 카카오의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를 통해 대중의 검증을 먼저 받기도 한다. 텀블벅이나 와디즈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 글의 일부를 올려 투자를 받아 출판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난해 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킨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도 텀블벅을 통해 독립출판물로 나와 입소문을 탔다. 텀블벅을 통해 나온 신간은 2014년 112권에서 지난해 700권으로 늘었다.
2015년 6월 서비스를 시작한 카카오 브런치엔 일련의 심사를 통과한 2만3000여 명의 작가가 활동 중이다. 브런치 구독자 수는 120만 명에 달한다.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들이 출간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좋은 콘텐츠를 발견하면 출판사 측에서 먼저 출판 제안을 하기도 한다. 출간 1년도 안 돼 3만 부 넘게 팔린 《90년생이 온다》뿐 아니라 《직장 내공》 《어느 소방관의 기도》 등도 브런치의 인기 콘텐츠였다. 카카오 관계자는 “자유롭게 한 편씩 쓸 수 있어 일하면서 글을 쓰는 직장인의 참여가 늘고 있다”며 “덕분에 다양한 주제별로 양질의 콘텐츠가 쌓이고 있다”고 말했다.
투고하거나 투자받기가 여의치 않다면 독립출판도 방법이다. 디자인과 편집, 유통까지 혼자 해야 하지만 자유로운 제작이 가능하다. 독립출판물 특성상 개성 넘치는 주제와 글이 많아 대형 출판사들도 적극적으로 ‘될 만한 작품’을 찾아다닌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도 50쪽가량의 독립출판물로 선보인 뒤 21세기북스에서 재탄생했다. 지난해 문학동네에서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낸 이슬아 작가 역시 독립출판계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90년생이 온다》를 만든 김남혁 웨일북 편집자는 “기본적인 문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콘셉트가 명확해야 책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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