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정림 KB증권 사장, '유리천장' 깬 증권사 첫 女사장…워킹맘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일해야

입력 2019-03-01 18:41  

"디테일 없는 경영은 사상누각
고객 행복 위해 '쫀쫀한 CEO' 될 것"



[ 임근호/전범진 기자 ]
박정림 KB증권 사장과 만난 미로키친은 시끌벅적했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조그만 식당인데, 테이블 4개가 단체손님으로 꽉 찼다. 뒷사람과는 거의 등을 맞대고 앉아야 했다. “조금 시끄러울 순 있는데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란 점이 매력적이에요. 보통 우리 나이 때는 독방에서 만나잖아요. 여기선 쉽게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옆 테이블과도요.” 박 사장은 이 식당 단골이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날도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옆 테이블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박 사장은 지난 1월 김성현 사장과 함께 KB증권 각자대표에 취임했다. 증권업계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쫀쫀한 CEO’가 되겠다고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디테일에 강한 CEO다. “고객이 행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쫀쫀한 CEO가 되겠습니다. 고객이 불행한데 선 굵은 CEO가 무슨 소용이에요.”

30여 년 만에 이룬 꿈

첫 요리로 골뱅이샐러드가 나왔다. 맛간장을 뿌려 살짝 볶은 백골뱅이가 샐러드와 함께 그릇에 담겼다. 입에 넣고 씹자 쫄깃쫄깃한 식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박 사장은 “3주마다 제철 재료에 맞춰 메뉴를 바꾸는 식당”이라며 “항상 신선한 재료를 맛볼 수 있어 자주 와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 시원하다.” 맥주를 한 잔 들이켠 박 사장이 말했다. 그러고는 직접 가져온 와인을 꺼냈다. 주종을 안 가린다고 했다. 주량은 공식적으로 소주 한 병 반. 두 병까지도 마실 수 있다고 했다. 충분히 더 마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대학 때만 해도 제가 술을 잘 마시는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굉장히 잘 드셨지만요.”

박 사장은 서울 영동여고를 졸업했다. 지금은 남녀공학인 영동일고로 바뀐 곳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얘기를 했다.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 82학번이다. “공부는 열심히 안 했는데, 시험 문제를 잘 읽어요.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아는 거죠.” 어릴 때부터 잘못된 것에 대해선 의사 표현을 똑 부러지게 하는 편이었다며, 고교 때 백지 시험답안지를 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선생님이 틀린 개수대로 손바닥과 발바닥을 때렸어요. 그게 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항의 의미로 백지 답안지를 낸 거죠.”

주꾸미구이와 미나리무침이 테이블에 올려졌다. 새벽에 충남 홍성에서 올라온 주꾸미는 탱탱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옆에 같이 놓인 돌미나리는 상큼했다. 보통 주꾸미는 빨갛게 양념하는데, 이 집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빨간 양념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박 사장은 고교 때부터 꿈이 ‘사장님’이었다. “TV를 너무 봤나. 어린 마음에 잡초 같지만 큰 기업에 들어가 으?으?하며 일하는 게 좋아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산부인과·소아과 의사였는데, 전문직에 대한 로망은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들어간 서울대 경영학과의 82학번 동기 중엔 증권업계 CEO가 많다.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 김신 SK증권 사장, 메리츠종금증권 사장을 거친 김용범 메리츠금융지주 부회장이 모두 박 사장과 동기다. 지금도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다.

1년 계약직에서 사장까지

1993년 한 신문 기사를 보면 박 사장 이름이 등장한다. ‘정밀한 자료 분석 능력 등을 바탕으로 국회에 여성 보좌진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는 1992년부터 2년 동안 정몽준 통일국민당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다. 1986년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체이스맨해튼은행(현 JP모간체이스은행) 서울지점이었지만 2년 뒤 대학원을 다니고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새 직장을 찾고 있을 때 기회가 왔다고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국계 증권사인 슈로더에 지원서를 냈다가 떨어졌습니다. 애널리스트가 되고 싶었거든요. 우연히 소개를 받아 면접을 본 게 정몽준 의원실이었어요.” 정책도 짜고, 대정부 질문도 만들고, 공무원도 만났다. 그 덕분에 금융에만 있었으면 좁았을 시야가 넓어졌다고 했다. “일도 재밌었고 자부심도 컸어요. 나이가 있었다면 계속 그 일을 했을지도 몰라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민간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1994년 조흥은행이 조흥경제연구소를 세우면서 책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때부터 리스크 관리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냈고, 1999년 삼성화재 자산운용실 팀장으로 영입됐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높아지던 때였다. 2002년엔 한국인 최초로 세계리스크관리전문가협회 임원에 당선됐다. 국민은행으로 간 것은 2004년. 이증락 당시 국민은행 부행장의 권유로 옮겼다고 했다.

입안이 좀 텁텁하다 싶을 때쯤 참치와 마가 나왔다. 차가운 참치를 넣자 입 안이 상쾌해졌다. 뒤이어 메인 요리인 새조개와 차돌박이 구이가 푸짐하게 그릇에 담겨 나왔다. 새조개는 겨울 끄트머리인 지금이 제철이다. 새조개에 차돌박이, 시금치, 절임 배추를 ‘사합’으로 싸 먹는데, 맛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술이 맥주와 와인을 거쳐 제주도산 소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국민은행 시절로 이어졌다.

“시장운영리스크부장으로 들어왔어요. 전문 인력이라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1년 계약직이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없었어요. 대신 처절하게 노력했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한 만큼 처우해주니 좋은 점도 있었고요. 임원이 되니 계약 기간이 2년으로 늘어나 좋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술자리는 물론 필요할 경우 동료 선후배들이 모여 흡연하는 장소까지도 같이 가서 어울렸다고 했다. “남성들 세계에선 중요한 일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도 위로 오빠가 셋이고, 경영학과도 거의 남학생이다 보니 남성들과 어울리는 게 어렵진 않았어요.”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못 끝낸 일이 있으면 집에 들고 가서 처리했다. 새벽 4시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날 일은 그날 다 처리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대신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지 마라’가 박 사장의 철칙이다. “많은 여성 직장인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는 강박이 있어요. 집이 좀 더러우면 어떻고, 요리를 안 하면 어때요. 포기할 건 포기해야죠. 어떻게 사람이 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약속 없는 휴일엔 늦잠 자고, 와인 마시면서 주문형 비디오(VOD)로 밀린 드라마 보는 게 낙이라고 했다.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부서가 사라져 조사역으로 발령 난 적도 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한직으로 밀려났을 때나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조직이나 윗사람은 이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며 “조직에서 잘나가는 사람을 봐도 꽃길만 걸은 사람은 없고, 한직에 있을 때도 열심히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1년 뒤 KB증권의 달라진 모습 지켜봐 달라”

코다리조림과 냉이된장찌개, 밥이 나올 때쯤 박 사장이 남은 와인 한 병을 들고 앞 테이블로 갔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으로 불편하게 해 죄송하다”고 말을 건넸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KB증권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박 사장이 좋아하는 경영자는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와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다. 고객과 디테일에 집착하는 공통점이 있다. “고성장 시대에는 차별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뭘 하든 수익이 났습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잖아요. 꼼꼼하지 않으면 수익이 안 납니다. 디테일이 없는 큰 그림은 사상누각에 불과해요. 베이조스도 고객에게 집착하는데 우리가 고객에게 집착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어요?”

박 사장이 “보물”이라며 다이어리 두 권을 보여줬다. 글로 빽빽했다. 매일 해야 할 일과 업무 추진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일들이 적혀 있었다. 분홍색 다이어리는 KB증권 사장, 녹색은 겸임하고 있는 KB금융지주 자본시장부문장 업무용이다. “처리된 것은 형광펜으로 칠하고, 안 된 건 계속 물어봅니다. 쫀쫀하다고 할지 몰라도 고객 행복을 위해서라면 쫀쫀한 CEO가 되는 게 나아요.”

박 사장은 1년 뒤 KB증권이 어떤 증권사로 바뀌어 있을지 기대해 달라고 했다. 그는 “증권업계 첫 여성 CEO, 은행에서 온 증권사 사장, 역할이 나뉜 각자대표라는 점에 시장의 의구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며 “이 세 가지 모두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KB증권은…

KB금융그룹 계열 증권회사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자기자본 4조3955억원으로 업계 5위다. 2016년 현대증권을 인수하고 2017년 1월 통합법인이 출범하면서 단숨에 업계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국민은행과의 복합 점포 운영 등을 통해 그룹 시너지를 강화하는 한편, 금융당국에 단기금융업(발행어음) 인가를 신청하는 등 초대형 투자은행(IB)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베트남 자회사 KBSV를 통해 급성장하는 베트남 자본시장에도 진출했다.

2017년 통합법인 출범 이후 각자대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박정림 사장이 자산관리(WM)와 세일즈앤드트레이딩(S&T), 경영관리 부문을, 김성현 사장이 IB와 홀세일, 글로벌 사업, 리서치센터를 맡고 있다.

■박정림 사장 약력

△1963년 서울 출생
△1982년 영동여고 졸업
△1986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91년 서울대 경영학 석사
△1986년 체이스맨해튼은행 서울지점 입사
△1992년 정몽준 국회의원 비서관
△1994년 조흥은행 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
△1999년 삼성화재 자산운용실 팀장
△2004년 국민은행 시장운영리스크부장
△2012년 국민은행 WM본부장
△2014년 국민은행 리스크관리본부 부행장
△2015년 국민은행 여신그룹 부행장
△2017년 KB금융지주 WM총괄 부사장 겸 KB증권 WM부문 부사장
△2019년 KB증권 사장 겸 KB금융지주 자본시장부문장


박정림 사장의 단골집 미로키친

제철 재료 사용한 계절요리…3주마다 메뉴 바뀌어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4번 출구에서 대주피오레아파트 방향으로 460m가량 들어오다 보면 조그만 간판이 보인다.

요리사 이진명 씨가 2012년 연 제철 요리 음식점이다. 식사는 코스 요리인 ‘미로 특선’ 한 가지다. 약 3주마다 제철 재료에 맞게 메뉴 구성이 바뀐다. 지금은 골뱅이샐러드, 주꾸미구이와 미나리무침, 참치와 마, 새조개와 차돌박이 구이, 코다리조림과 식사로 구성돼 있다. 인터넷에선 ‘단골들만 아는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며 노량진시장 가락시장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나 비싼 재료는 지방에서 직접 구해온다. 이씨는 “지금 제철인 새조개는 지난해 날씨가 너무 더웠던 탓에 공급량이 달린다”며 “충남 홍성에서 매일 15㎏씩 택배로 받아온다”고 말했다.

문어샐러드, 석화, 전복구이, 물회, 보리굴비, 소꼬리찜, 가리비구이, 광어와 참치회, 웅피조개찜, 병어조림, 간장게장, 연포탕, 항정살 파절임, 갈치조림 등 계절에 맞게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미로 특선 7만원. 영업시간은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며 일요일은 쉰다. 장소가 넓지 않고 단체 손님이 많아 100% 예약제로 운영한다.

임근호/전범진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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