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구석구석 아시아 (3) 인도 남부 도시, 코치
남인도는 다르다. ‘인도’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한가롭다. 야자수 아래 여유가 넘실댄다. 읽고 쓰는 문자도 다르다. 남인도 케랄라주에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 코치(Kochi). 코치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항으로, BC 3세기부터 향신료를 사고팔았던 도시다. 아담한 코치에 긴 역사와 다양한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유다. 바람결에 실려 날아온 시나몬 향을 따라 남인도 코치로 떠나보자.
인도의 대표적인 향신료 무역항
코치는 한때 스타였다. 향신료 무역의 중개지로 이름을 날렸다. 코치가 속한 케랄라 지역은 향신료가 잘 자라는 천혜의 땅이었다. 카다몬, 커민, 가람마살라 등 이름마저 이국적인 향신료들이 넘쳐났다. 향신료는 알싸한 향을 솔솔 풍기며 유럽인들을 코치로 불러들였다. 향신료는 한때 보석보다 비싸게 거래될 정도로 귀했다. 향신료 무역이 부와 권력을 상징했던 시대, 코치는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온 이방인에게 황금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색 다른 이들이 세계에서 몰려들면서 코치에는 문화가 섞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코치에서는 인도 남부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 문화와 인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대인 마을까지 다양한 문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아라비아해의 황홀한 바다와 울창한 야자수 숲, 고요한 항구는 덤이다. 자그마한 마을에 겹겹이 쌓인 나이테는 코치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성당부터 교회, 유대교 회당까지
유럽에서 향신료를 찾아 온 이들은 코치에 성당을 세웠다. 1503년 건설된 인도 최초의 성 프란시스 성당이다. 성 프란시스 성당은 기구한 운명을 갖고 있다. 포르투갈 수도회에서 성당으로 지었지만, 코치가 네덜란드 영향 아래 들어가면서 개신교회로 사용됐다. 이후 영국 지배 때는 성공회당으로 쓰였다. 성 프란시스 성당은 슬픈 과거를 안고 덤덤하게 서 있다.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쿠 다가마의 흔적을 좇아 성당을 찾는 이도 적지 않다. 다가마의 시신이 12년간 성 프란시스 성당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 안에는 다가마의 묘비가 남아 있다. 1498년 코치 북부에 도착한 다가마는 코치를 향신료 무역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다 코치에서 눈을 감았다.
성 프란시스 성당과 함께 여행자들이 들르는 곳이 마탄체리 궁전과 유대인 마을이다. 마탄체리 궁전은 코치를 지배하던 마하라자가 머물던 궁전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지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힌두 신화를 담고 있는 벽화가 화려하다. 마탄체리 궁전에서 나오면, 유대인 마을로 이어진다. 한때 500여 가구에 달할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마을에 살았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수백 년간 코치에 머무른 유대인이었지만,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둥지를 하나둘 옮겼다. 마을에는 유대인의 흔적인 파르데시 시나고규라는 유대교 회당이 남아 있다. 고즈넉한 회당에 앉아 구석구석 살펴보면, 인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와 있는 착각이 든다.
유대인 마을은 골동품점이 모여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긴 세월 코치를 여러 문화의 사람들이 오가던 흔적이다. 현란한 색의 가네시상을 비롯해 두 손 모으고 있는 성모상, 작동하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전화기까지 작은 골동품 가게 안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물건이 쌓여 있다. 골동품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코를 자극하는 향이 달려든다. 향신료가 가득한 스파이스 마켓이다. 쌀자루만 한 큰 포대에 클로브와 카다몬, 시나몬, 정향 등 귀한 향신료가 넘쳐난다. 색도 향도 모양도 다른 향신료들. 향에 흠뻑 취해 있다 보니, 이제야 ‘아, 인도구나’하는 느낌이 온몸에 퍼진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예술의 도시’
코치는 카페에서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며 향기로운 차 한 잔 즐기기 더없이 좋은 도시다. 고풍스운 분위기와 함께 ‘예술의 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향신료를 둘러싼 암투와 분주한 무역이 과거였다면, 현대 미술과 풋풋한 낭만이 코치의 오늘이다.
코치 구시가를 어슬렁거리다보면 눈을 사로잡는 새하얀 건물이 나타난다. 아스핀월 하우스로, 코치가 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향신료를 비롯해 각종 무역품을 저장하던 공간이다. 코치에서 2년마다 국제미술전인 비엔날레가 열리는데, 아스핀월은 비엔날레(Kochi Muziris Biennale)가 열리는 대표적인 장소다. 인도 작가들의 독특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올해 비엔날레는 3월 29일까지 코치 곳곳에서 펼쳐진다.
비엔날레 전시작품은 아스핀월뿐만 아니라 향신료 창고로 쓰였던 페퍼 하우스(Pepper house)에서도 접할 수 있다. 페퍼 하우스는 고즈넉한 야외 카페와 천장이 높은 아름다운 도서관이 어우러져 코치의 낭만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코치에는 카페투어를 하고 싶을 만큼 멋진 카페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대표적인 곳이 카시 카페(Kashi cafe)와 데이비드 홀(David Hall)이다. 두 공간 모두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남인도 커피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아트 카페다. 아기자기한 작품을 보고 싶다면 카시 카페로, 넓은 정원에서 그네를 타며 여유를 누리고 싶다면 데이비드 홀을 추천한다. 티 폿(Tea Pot)은 공간 자체가 작품 같은 카페다. 알록달록한 찻주전자를 높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놨다. 유쾌한 인테리어 속에서 맛보는 이국적인 차 한 잔. 수많은 이들이 왜 코치에 반했는지 어렴풋이 감이 온다.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전통공연, 카타칼리
현대미술이 주류를 이루지만, 전통문화를 볼 수 있는 공연도 있다. 바로 남인도 전통 무용인 카타칼리(kathakali)다. 카타칼리는 바라트 나트얌, 카탁, 마니푸리와 함께 인도 4대 무용 중 하나로 꼽힌다. 대사가 따로 없는 무언극으로, 음악과 표정,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카타칼리 공연이 다른 공연과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분장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연은 오후 6시에 시작하지만, 관람객들은 한 시간 전인 5시부터 자리하고 있다.
카타칼리 공연을 보기 위해 케랄라 카타칼센터로 향했다. 5시가 막 넘었을 뿐인데, 이미 배우들이 분장을 시작했다. 붓으로 세밀화를 그리듯, 거울을 보면서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들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졌다. 우락부락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메이크업의 힘으로 곱디고운 여인으로 변신했다.
공연 시작 전, 얼굴로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는지 보여줬다. 사람의 표정이 다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이처럼 수많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표정과 눈동자뿐만 아니라 무드라라고 부르는 손동작도 중요하다. 사물을 표현할 때 주로 손을 이용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세 명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나와 갈등과 고뇌의 순간들을 보여줬다. 분장할 때 보지 못했던 화려한 복식도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큰 동작에 힘을 주기 위해 양쪽 발에 주렁주렁 방울을 달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카타칼리는 힌두신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번 공연은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 중 일부로, 왕자의 부인을 겁탈하려는 악인을 물리치는 이야기였다. 전통 음악이 깔리고 그 음악에 맞춰 시시각각 변하는 배우들의 세심한 표정과 섬세한 동작, 가끔 터지는 거침없는 괴성까지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막이 내린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참 동안 공연장에서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코코넛의 고소함을 담은 남인도 밀스
전통 문화를 맛봤다면, 다음은 음식을 맛볼 차례다. 식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남인도식 백반, 밀스(meals)는 꼭 맛봐야 할 현지 음식이다. 반찬 격인 사브지와 소스인 차트니를 밥과 함께 낸다. 북인도 백반인 탈리에는 차파티가 올라오지만, 밀스에는 밥이 나온다. 손으로 쓱쓱 비벼서 먹는다. 인심도 후해서 차트니와 밥, 사브지를 원하는 만큼 계속 추가해준다. 밀스를 조금 더 맛있게 먹고 싶다면, 생선튀김이나 조림을 한 토막 추가로 주문하자. 한 끼 식사가 더 풍성해진다.
밀스를 먹다 보면 코코넛의 고소함이 느껴진다. 야자수 넘실거리는 남인도답게 음식을 만들 때 코코넛을 듬뿍 넣기 때문이다. 향신료가 풍성해, 반찬은 코와 혀를 자극하는 알싸한 맛이 난다. 밀스가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는 그릇에 있다. 남인도에서 밀스를 주문하면 대부분 바나나 잎에 올려준다. 식당 한쪽에 바나나 잎이 층층이 쌓여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코치의 하루는 중국식 어망 감상으로 마무리한다. 중국식 어망은 코치의 아이콘 중 하나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망을 보기 위해 아라비아해로 나간다. 바다에 거대한 그물망이 줄줄이 널려 있다. 건강한 팔뚝을 한 장정들이 그물을 내린 뒤 고기가 모이기를 기다렸다 그물을 건져 올린다. 잡히는 고기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인간의 힘으로만 고기를 잡아 올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행자들에게는 어망이 늘어서 있는 곳이 일몰 포인트다.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하늘과 삼각형 모양의 어망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코치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간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어망에 묻어 있는 것 같다. 파스텔 톤으로 젖어드는 하늘처럼, 마음속에 코치가 진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코치=글·사진 채지형 여행작가 travelguru@naver.com
여행정보
◆시차: 한국과 3시간30분 차이가 난다.
◆통화: 루피(INR)를 사용한다. 100루피는 약 1590원(2019년 1월 환율 기준).
◆항공: 한국에서 코치까지의 직항은 아직 없다.
에어아시아를 타고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하는 비행편이 많이 이용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통해 델리 또는 뭄바이로 들어간 뒤 국내선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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